ATM으로 전락한 일본··· 한국이 미국에 약속한 3500억 달러는?

이종태 기자 2025. 9. 17.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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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5500억 달러 규모 대미 투자 설계의 윤곽이 드러났다. 트럼프에게 부담 없이 쓰고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돈줄이 생겼다. 한국도 비슷한 조건을 요구받고 있으리라 추정된다.
지난 4월16일 미국 백악관에서 일본 아카자와 경제재생장관(오른쪽)이 ‘마가’ 모자를 쓰고 웃고 있다. ⓒ백악관 제공

친구가 찾아와 ‘10억원만 빌려달라’고 했다. 그 돈을 유망한 회사에 운용해 수익을 올리겠다는 것. 언제 갚으며 투자수익은 어떻게 배분할 작정이냐고 물었다. 친구는 절반씩 나누면 된다고 말했다. ‘내가 잘돼야 너도 좋잖아.’ 돈을 다른 펀드에 맡기면 ‘수익의 최대 20% 정도만 수수료로 지급하면 된다’라고 반박하고 싶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귀한 친구다. 힘도 엄청나게 세다. 뭐, 수익의 절대액이 크다면, 50%만 받아도 손해는 아니겠지.

그러나 친구가 엉뚱한 회사에 운용하다 손실을 내면 어쩌나. 10억원은 ‘내가 보유한’ 전체 금융자산의 40%를 웃도는 거금이다. 신중해야 한다. 그래서 ‘네가 투자할 때 내 의견도 반영할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친구는 본인이 알아서 할 것이라며 ‘웃기지 말라’고 한다. 어이가 없어서 ‘손실을 내면 어떻게 하려고. 네가 갚아줄 거야?’라고 반박했다. 친구의 답변은 기가 막혔다. ‘그걸 나한테 왜? 없던 셈 쳐.’

비현실적인 대화다. 그러나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나’와 친구가 아니라,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9월4일, ‘미·일 간 기본 합의의 이행을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자동차 등 거의 모든 일본산 상품에 대한 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춘다’는 미·일 합의(7월22일)가 9월16일부터 시행된다.

그러나 일본은 큰 대가를 치렀다. 9·4 행정명령서와 ‘백악관 설명서(Fact Sheets)’에 간단히 서술된 ‘일본의 대미 투자 5500억 달러(약 764조원)’ 부분이 그렇다. 두 문서엔 트럼프에 대한 찬사 및 자화자찬과 더불어 투자의 개요만 소개되어 있다.

이 돈의 운용(미국 내 어떤 산업의 어떤 기업에 투자할 것인가)은 트럼프가 결정한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일본의 ‘약속(commitments)’ 이행 여부를 감시하고 수시로 트럼프에게 보고한다. 일본 측이 약속을 어기면 트럼프는 관세율을 다시 올릴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약속은 ‘5500억 달러’다. 이 돈이 어떻게 투자될지의 윤곽은 미·일 합의(7월22일) 당시부터 대충 나와 있었다. 미국 내에 ‘펀드 법인(이하 ‘미·일 펀드’)’을 만든다. 이 펀드 법인은 미국 내 여러 산업에 투자하게 된다. 펀드를 설립하려면 자본금(equity)이 필요하다. 일본은 5500억 달러 가운데 1~2%(55억~110억 달러)를 출자한다. 이 돈은 ‘지분투자’이므로 돌려받을 수 없다. 그러나 나머지 98~99%(5390억~5445억 달러)의 경우, ‘이론적’으론 환수 가능하다. 일본의 국책 금융기관들이 (미국 정부가 아니라) 미·일 펀드에 빌려주거나(대출), 대출보증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조달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출보증’이란 펀드가 제3의 금융기관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지 못하면 일본 국책 금융기관이 대신 상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신 일본 측은 미·일 펀드로부터 대출에 대해서는 원리금을, 대출보증에 대해서는 수수료를 받는다.

미·일 펀드와 관련된 그 밖의 합의 사항은 9·4 행정명령 당일에도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틀 뒤부터 구체적 내용이 언론을 통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다. 9월6일자 〈파이낸셜타임스〉가 양국 간 ‘미공개 합의문(양해각서)’을 입수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어디에 투자할지’는 러트닉 상무장관이 위원장인 ‘투자위원회’에서 논의한 다음 트럼프에게 추천한다. 트럼프는 추천받은 여러 투자처 중 마음에 드는 곳을 선정하면 된다.

일본 측은 투자위원회의 결정에 낄 수 없다. ‘미국 측 인사’만으로 구성하게 약속되었다.

다만 일본 정부가 자국 시민들에게 면피할 내용이 아예 없지는 않다. 예컨대 투자위원회와 트럼프가 반도체 회사에 투자했다고 치자. 이 회사가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부품·기술·서비스 등을 일본 국적 회사에서 매입하도록 약속하면 어떨까? 일본의 수출이 늘어날 것이다. 그래서 투자위원회는 미·일 펀드의 돈을 받은 회사가 중간재나 서비스 등을 일본 국적 기업으로부터 매입하도록 “시도해야 한다(should attempt)”라고 약속되었다. ‘매입한다’가 아니라 ‘매입 시도’다. 안 되면 어쩔 수 없다. 또 트럼프가 어떤 기업에 얼마를 투자하도록 결정하면 일본 국책 금융기관들은 해당 자금을 45일 안에 조달하도록 못 박았다.

이런 약속들을 지키지 않으면 일본의 관세율은 다시 올라간다. 수익(cash flow) 배분은 당초 예상(‘90%는 미국 것’)보다는 일본에 유리(?)하게 설계되었다. 양국이 50대 50으로 나눈다. 다만 일정 기간 이후엔 미국의 몫이 90%로 커진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세계 4위 경제대국 일본이 미국과 합의한 이례적 조건들(unusual terms)은, 미국의 무역 상대국들이 관세 인하를 위해 극단적 양보까지 감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트럼프 임기 내 전액 집행 약속

일본 측은 일절 개입할 수 없을까? 9월6일 〈닛케이아시아〉 보도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투자위원회는 트럼프에게 투자 프로젝트들을 추천하기에 앞서 미국 측과 일본 측으로 구성된 ‘협의체(consultation body)’와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개입 정도는 낮다. 협의체인 만큼 거부권이 보장되지 않는다.

또한 〈닛케이아시아〉가 ‘일본 정부 소식통’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 이 펀드가 투자에 실패하거나 부도를 내도 미국 측은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다. 펀드가 5500억 달러 중 2000억 달러만 상환하고 청산된다면, 나머지 3500억 달러는 일본 국책 금융기관들이 손실로 처리해야 한다. 이른바 ‘비소구(non-recourse)’ 조건으로 펀드에 빌려주는 돈이기 때문이다. ‘비소구’가 붙으면 채권자(일본)는 펀드에 수익이 발생할 때만 그것을 배분할 권리를 갖는다. 수익이 없으면 받을 돈도 없다. 펀드가 사라지면 채권도 사라진다. 미국 정부와 투자위원회가 실질적 운용자이지만 그들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게 설계되었다. 트럼프 행정부로선 그야말로 ‘무위험 자본’을 아무 부담 없이 마음껏 쓸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일본은 ATM(현금자동지급기)으로 전락했다.

트럼프 임기 종료까지 투자를 미루며 시간을 벌 수도 있지 않을까? 양해각서에 따르면 이 또한 불가능하다. “투자는 2029년 1월19일, 트럼프 대통령 임기 마지막 날 전까지 집행되어야 한다”라고 ‘약속’되어 있다. 〈닛케이아시아〉 측과 인터뷰한 익명의 일본 고위 경제 당국자는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하에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한국은 지난 7월 말 무역 합의와 8·25 한·미 정상회담으로 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추기로 미국 측과 합의했다. 9월11일 현재까지도 세부 사항을 논의하고 있다. 핵심 쟁점은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펀드 조성’으로 보인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9월9일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3500억 달러 펀드를 어떻게 운용할지에 대한 양해각서(MOU) 문안을 두고 한국과 미국 사이에 협상을 수십 번 했다”라고 털어놓았다. 일본과 비슷한 조건을 요구받고 있으리라 추정된다. 이런 와중인 9월4일,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은 조지아주 엘러벨의 현대차·LG엔솔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을 덮쳤다.

3500억 달러는 한국 GDP(2024년 1조8699억 달러)의 19%, 2025년 예산(673조3000억원)의 72%, 외환보유액(7월 말 현재 4113억 달러)의 85%에 해당하는 규모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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