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80주년 기획 광주·전남 독립운동현장 50] (36)항일성지 완도 소안도…일본과 말 섞지 않고, 부역자는 불씨 안줘 [소안학교]
토지 반환 승소 성금 모아 1923년 5월 ‘사립 소안학교’로 정식 개교
송내호 수의위친계 결성…독립자금 모금·전국, 만주에 운동가 파견


완도군은 1896년 영암, 강진, 해남, 장흥군 소속 201개 섬을 합해 처음 만들어졌다. 완도군을 만든 이는 전남도 관찰사로 동학을 토벌한 이도재였다. 그는 김개남과 전봉준을 체포했다. 갑신정변과 동학 등 역사 고비마다 진압 책임자로 승승장구 했지만,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고금도로 귀양, 지금의 완도와 인연을 맺었다.
귀양 시절 섬사람들의 고충을 기억해 해배 후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완도군 등 3개군을 신설했다. 완도 고금면에는 그의 유배 당시 초가가 재현돼 있다.완도군의 설군 자체가 이도재의 인생 마냥 사연이 길다.
광주·전남 지역 독립유공자 1천521명 가운데 완도 출신은 최소 77명 이상으로 파악된다. 전국 군 단위 평균이 47명임을 감안하면 두드러진 수치다. 3·1운동, 상해 임시정부, 신간회,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한국 독립운동사의 거의 모든 장면에 완도 출신들이 큰 족적을 남긴다. 크고 작은 섬마다 불멸의 독립 영웅들이 있다.
소안도의 송내호·송기호 형제를 비롯해 신지도 장석천, 고금도 이기홍, 조약도 정남균, 군외 문승수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었다. 여기에 1933년 전남운동협의회 독립운동가까지 더하면 전국 어느 곳 보다 치열했던 항일 현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65일 태극기 게양된 해방의 섬
완도 화흥포 항에서 배를 타고 50분 남짓 남서쪽으로 향하면 자그마한 섬이 나온다. 인구 3천여 명, 이 작은 섬은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다. 일제강점기 동안 88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며, 함경도 북청과 부산 동래와 함께 조선 3대 항일 성지로 불린다.

이 자긍심은 '소안학교'에서 배양됐다. 사립 소안학교의 뿌리는 1913년 설립된 '중화학원'이다. 당시 소안 주민 송내호를 비롯한 선각자들은 서당을 통폐합하고 신식 교육기관을 열어 젊은이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려 했다.
이후 주민들은 친일파 관료와 벌인 토지 반환 소송에서 13년 만에 승소하자, 성금을 모아 1923년 5월 16일 '사립 소안학교'를 정식 개교했다. 개교 당시 학생 수는 270명. 하지만 일본은 1927년 5월 10일, 개교 4년 만에 소안학교를 강제로 폐교시켰다.
소안도의 항일 역사는 실상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됐다. 1886년 왜인 방화 의거가 출발이다. 일본 어민들이 미역, 전복, 해삼 등을 남획하며 소안도를 유린하자, 주민들이 집단거주지 막사를 불태우고 쫓아냈다.

#송내호와 수의위친계
소안도의 항일운동의 핵심 인물은 송내호 (1895~1928)선생이다. 그는 중앙학교와 중앙고보를 졸업하고 6개 국어에 능통했던 지식인이자, 행동하는 독립운동가였다. 소안도에서 나고 자랐지만, 학창시절은 서울에서 보냈다.
1914년 송내호와 동지들은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를 결성했다. 친목과 상부상조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비밀결사였다. 이 조직은 호남과 경상도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해갔으며, 독립군 자금을 모아 만주와 중국으로 전달했다.
송내호는 지역 청년들을 중국 대륙으로 파견했다. 중국 황포군관학교에 2명, 북경에 한원석(동래), 장진우(완도), 강우열(완도), 정권익(약산), 정윤섭(약산), 강세원(보길), 천기정(노화), 신우승(소안) 등 8명을 보냈다. 중국 만주 용정에는 정남국(소안), 임재갑(신지), 박화국(소안), 이형두(소안), 권유섭(노화),이형춘(완도) 등 7명을 보내 용정 일대 대성, 동흥, 은진학교의 교사로 활동하게 했다.
한반도 남쪽 끝 자락 청년들이 중국 만주 대륙에서 독립운동의 씨앗을 뿌린 셈이다. 조직 구성원은 소안도를 넘어 완도, 신지, 고금, 금일, 광주, 담양, 구례, 고창, 영광, 무안, 영암, 나주, 장성, 목포, 동래, 상주 등 전국 각지에 퍼져 있었다. 이는 섬이라는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은 전국적 네트워크였다.

# 살자회와 끝없는 투쟁
1926년, 소안 주민들은 '상호부조, 정의에 희생, 신사회 건설'을 모토로 한 살자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일제는 1927년 이 조직을 적발, 13명을 검거했다. 배달청년회가 서울청년회와 연계해 공산주의를 전파했다는 죄목까지 덧씌워, 800여 명 주민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이 여파로 송내호 선생은 옥고 끝에 1928년 순국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짧지만 치열했던 생은 오늘날에도 '실천적 조직가'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그의 삶과 죽음은 후대 청년들에게 항일의 길을 잇게 하는 정신적 유산이 되었다. 소안도의 항일투쟁은 단순한 시위나 의거에 그치지 않았다. 주민들은 '불언동맹'을 맺어 일제 경찰과는 일절 말을 섞지 않았고, 부역자에게는 불씨조차 나누어주지 않았다.
또한 투옥된 동지를 위해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고 이불조차 덮지 않는 고난의 동참을 실천했다. 섬 곳곳에서는 독서회, 강연회, 신간회 지부 활동이 이어졌고, 노농대성회 같은 조직이 결성되며 남부지역 전역을 잇는 항일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박찬승 교수는 "소안도 주민들은 1910년대 부터 신학문에 크게 관심을 갖고 외부세계, 근대문명과 결합했는데, 이는 목포~제주, 부산~인천을 잇는 항로에 위치한 점이 크게 작용했다"면서 "김사홍, 송내호 등 뛰어난 지도자들의 영향으로 일제의 의해 항일조직이 끊어지곤 했지만, 그 때마다 새로운 세대의 운동가들이 배출되었다"고 밝혔다.('일제하 소안도의 항일민족운동' 논문 참조)
항일 섬 소안도-. 그곳 바람과 파도에는 20년 넘게 끈질기게 조직적 항일운동을 펼친 송내호의 혼이 머물고 있다. 또 송내호와 함께 한치의 흔들림없이 대일투쟁을 전개했던 조약돌 보다 더 단단한 단결력이 존재했다.
그들은 작은 섬의 폐쇄적 저항에서 탈피해 중국 대륙에서,독립전사를 훈육했다. 글로벌한 항일 정신이 완도 그 푸른 파도에….

위치: 전남 완도군 소안면 가학리 297-1 (소안학교)
[소안도 항일 일지]
1905~1921: 토지소유권 반환 청구 소송.
13년간 법정 투쟁 끝에 승소, 주민들이 모은 성금으로 사립 소안학교 설립
1909: 당사도 왜인 등대 습격
1913: 중화학원 개교
1914: 비밀결사 '수의위친계' 결성
1915: 배달청년회 조직
1919: 3·1운동 참여
1923: 소안학교 개교
1924: 소안노농연합 대성회 조직
1926: 사회주의 계열 '살자회' 결성
1927: '일심단' 조직
1928: 소안학교 강제 폐쇄, 송내호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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