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서 옛 연인 만나듯, 저도 詩와 재회했죠”
‘편의점에서 잠깐’ 낸 정호승

“시에서 서정은 밥할 때 마지막에 붓는 물과 같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서정 시인 정호승(75)은 “물을 붓지 않으면 밥을 지을 수 없는 것처럼 시에서 서정은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최근 열다섯 번째 시집 ‘편의점에서 잠깐’(창비)을 펴냈다. ‘슬픔이 택배로 왔다’ 이후 3년 만의 신작 시집. 이달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시인은 “요즘은 ‘게을러져도 괜찮다’ ‘모든 일을 천천히 하자’는 마음으로 쓴다”고 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내 삶의 속도에 충실하자.”
노년의 속도감에 익숙해지는 중이지만, 거기서 새로움을 찾는다. 정호승은 “시라는 장르는 나이 든 삶과 함께 간다”고 했다. “노년의 삶이란 응축되는 것, 액기스만 남아서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지요. 바닷물에서 물이 다 증발하고 소금만 남은 시기인데, 그 소금 같은 것이에요.” 시인은 “그 장점을 갖고 시집 한 권을 더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실패가 키운 자신감이다. 시집의 문은 시 ‘패배에 대하여’로 연다. ‘나는 패배가 고맙다/ 내게 패배가 없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시인은 “이기지 못해도, 져도 괜찮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며 “패배가 감사한 삶이 나를 사랑할 수 있게 한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작은 새 한 마리가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포르르 날아가는 시간이 인생의 시간”. 그 찰나에 “추락과 실패를 경험하지 않으면 비상할 수 없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지난 시집을 펴내고 1년 가까이 시와 담을 쌓았다. “시의 샘이 말라버렸던 때”다. 시인으로서는 패배를 맛본 시기다. 시인은 “처음엔 (시를 안 쓰니)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라며 웃었다. 그러나 고민이 깊었다. 시를 쓰지 않는 동안 “시 한 편 한 편이 다 새로움인데, 이제 나에게 어떤 새로움이 있을까? 새로움의 눈이 이미 상실되지는 않았을까?” 되물었다. 그러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인간의 삶도 변화 속에 있는데, 시인의 눈으로 사물과 현상, 인간과 인생을 다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시의 샘을 천천히 파내기 시작했습니다.”
샘에서 물이 마구 솟았다. 이번 시집에 실린 125편 중 100편이 미발표 신작 시다. 그는 시를 몰아 쓰는 시기를 “상승 기류를 타는 것”에 비유했다. “시의 마음과 시 쓰는 시인의 마음이 일치하는 기류를 느낄 때 빨리 끌려가야 한다”고 했다. “시의 마음이 시인의 마음을 끌고 가준다는 건, 시가 나를 사랑해준다는 거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보듬어야 해요.”
시의 마음에 끌려가며 편안하게 쓴 시들이 여럿 있다. 표제작 ‘편의점에서 잠깐’도 그런 시다. 한때 연인이 편의점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서사적이면서 서정이 짙은 시. “편의점은 현대적 감각을 지닌, 우리 삶의 중요한 공유의 장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어떤 풍경이 될까?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점점 커지며 하나의 서사를 이루었습니다.”
왜 하필 헤어진 연인이었을까. 시인은 “편의점에서 빚쟁이나 원수를 만나면 안 되잖아요?” 되물었다. “안 될 건 없지 않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큰일 난다”고 했다. 서정시라는 장르를 벗어나지 않겠다는 의지다. 그의 서정은 한국 시의 중요한 명맥이다. “내가 아무리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이지만, 전통적 서정을 이어가는 한국 시인이고 싶어요. 그게 내 임무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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