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이 ‘이사’하는 것이라면… 사회의 格은 이사하는 방식에 달렸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소녀 렌, 부모 별거로 분열 체험… ‘비우호적인 세상, 뭘 해야 하나’
불놀이 의례, 타인 호의 접하며… 부모 용서하고 청소년기 통과해
성장은 문제 해결 아닌 통과 과정… 통과하는 방식이 한 사회의 수준


그러나 부모의 결별로 인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렌이다. 하나여야 하는 집이 ‘두 개의 집’으로 분열된 것이다. 청소년에게 분열된 집은 곧 분열된 세계다. “좋든 싫든 태어나버린 이 세계 속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소마이 감독은 말했는데, 바로 그 세계가 분열돼 버린 것이다. 엄마 아빠를 재결합시킬 힘 같은 것은 렌에게 없다. 남은 것은 이 분열된 세계와 더불어 사는 일뿐이다. 청소년 렌은 이 시련을 통과해야만 어른이 될 것이다.
부모의 결별은 단순히 가정 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렌의 사회생활, 즉 학교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이들은 영악하다. 누가 부잣집 아이인지, 누가 화목한 집 아이인지 귀신같이 알아보고 그에 맞춰 상대를 대한다. 이를 잘 아는 렌은 부모가 결별했다는 사실을 숨긴다. 더 이상 그 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됐을 때 렌은 수업 중에 책상 위 알코올램프를 쳐서 넘어뜨린다. 불은 번져 교실을 태우기 시작한다. 학교로 소환된 렌의 엄마는 부르짖는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실수로 그런 거라고 말해줘!” 그러나 렌은 이 세상을 불태우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청소년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세상을 바꿀 힘이 없는 청소년은 어떻게 해야 하나. 세상 전체를 불태울 힘이 없는 청소년은 어떻게 해야 하나. 세상 전체를 재건할 힘이 없는 청소년은 어떻게 해야 하나. 원작소설 ‘두 개의 집’과 영화 ‘이사’는 정확하게 이 질문을 제기한다. 답은 무엇인가? 그 답을 담고 있는 영화 후반부는 원작 소설에 없다.

바로 이 여행의 체험이 렌을 바꾼다. 여행에서 돌아온 렌은 부모의 결별 사실을 친구들에게 공개적으로 밝힌다. 자신의 세계가 분열됐음을 공식적으로 수긍한다. 그에 그치지 않고, 상급학교에 진학한 렌은 엄마에게 꽃을 주고 아빠의 어깨를 토닥인다. 즉, ‘이사’는 성장의 서사인 동시에 어쩔 수 없었던 부모를 용서하는 서사이기도 하다. 결국 성장이란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이사’하는 것이다. 지나가고 통과하는 것이다.
이것을 문제의 해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을 통째로 바꿀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해결이 아니다. 그러나 그 세상에 안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한 변화이기도 하다. 삶이란 해결돼야 할 문제가 아니라 통과해야 할 과정이다. 청소년기의 어두운 숲을 통과하고 나면, 이제 어른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어른의 세계 역시 해결해야 할 문제라기보다는 통과해야 할 과정이다. 비와 호수의 불놀이 축제가 그러했던 것처럼, 상호 협조 속에 조율된 의례는 그 통과의 과정을 덜 야만적이고 더 심미적으로 만들 것이다.
한 사회의 수준은 종종 어떤 문제를 발본색원한 결과보다는, 그 문제의 숲을 통과하는 방식에서 더 잘 드러난다. 렌은 우연히 만난 노부부의 집에서 간식을 대접받으며, 그들의 자식이 오래전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노부부는 일찍 죽은 자식에게 하듯 렌에게 달콤한 간식을 베푼다. 시원한 물줄기 같은 그 호의가 렌이 입은 청소년기 화상(火傷)을 달래줬다고 나는 믿는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Copyright © 동아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트럼피언’ 불 당기고 백악관은 기름… “좌파는 해고-처벌”
- [김승련 칼럼]‘공벽노’ 품어야 트럼프 넘는다
- [사설]“내란공범” “자업자득”… 與 사법부 압박 지나치다
- 정청래 “악수 한번 더” 김병기 “부부도 티격태격”…웃음 속 만찬
- 美, 11일만에 첫 ‘유감’ 표명… “재입국 불이익 없을 것”
- [사설]“구인할 테면 하라”… 한동훈이 그래선 안 된다
- [사설]대만, 22년 만에 韓 1인당 GDP 추월 전망… 혁신이 갈랐다
- 갯벌 해경, 숨지기 전 “추가인력” 요청했지만 대응 없었다
- “서학개미 이미 스테이블코인 ETF 투자 늘려” “연말 대출런 우려”
- “죄수복-머그샷 뒤 ‘니하오’ 조롱… ‘삶은 콩’만 보면 치떨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