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택의 그림 에세이 붓으로 그리는 이상향] 87. 하룻밤의 가족 캠핑 이야기

이광택 2025. 9. 12.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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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언어를 내려놓을 때, 자연은 비로소 말을 걸어온다
자연이야말로
우주, 아니 그 축소판인
인간의 몸통을 돌고 있는
혈액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
철학자, 그리고 친구들의
놀이터이자 학교가 곧
산과 나무요 계곡과 숲이지
않았던가
▲ 이광택 작 ‘배롱나무·무궁화 꽃 핀 한 여름 밤’

참숯불 피워 놓은 듯한 불볕더위가 길게 이어지던 7월 27일, 화천의 만산동 계곡에서 하룻밤을 묵고 왔다. 오후 1시경 집을 나설 땐 숨이 멎어버릴 듯 맨머리의 여름 해가 물엿처럼 쇳물을 녹여 퍼부어대는 듯하고 절절 끓는 땅바닥에서는 놋쇠 익는 냄새까지 나는, 그야말로 가마솥더위의 끝판왕이 따로 없는 날이었다.

하지만 불과 40여 분의 공간 이동 끝에 당도한 계곡은 천국이 따로 없었다. 기온의 서늘함도 좋았지만, 순간 내 마음은 근원으로서의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계곡 캠핑장에 들어서자 푸르디푸른 산자락의 양 켠 사이로 군살 하나 없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낙엽송과 참나무, 소나무들이 감미로운 광채를 뿜어내며 하늘에 닿아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새에릉 새에릉 참매미들이, 그리고 끄악 끄악 물까치들이 울었다. 나무 아래에서 그저 앉아 있거나 서성거리기만 해도 나의 핏줄에 맑디맑은 수액이 양껏 돌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순간 나는 바로 곁에서 지저귀는, 산에 사는 새처럼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국어 교과서를 억지로 읽는 어린아이같이 나른하고 단조로운 일상에 지쳐 있었는데 솔바람 소리 같은 신선한 일렁거림이 마음속에서 슬며시 피어나는 것이었다. 인간이 언어를 내려놓을 때 자연은 비로소 말을 걸어온다. 자연이야말로 우주, 아니 그 축소판인 인간의 몸통을 돌고 있는 혈액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모든 것’이 되는 게 자연이 아닐까 싶었다. 수많은 시인과 소설가, 철학자, 그리고 친구들의 놀이터이자 학교가 곧 산과 나무요 계곡과 숲이지 않았던가. “가장 작은 것, 가장 조용한 것, 가장 가벼운 것, 도마뱀의 바스락거림, 한 번의 숨결, 한 번의 스침, 순간의 눈길, 바로 이처럼 작은 것이 최고의 행복을 만든다”고 니체는 말했다.

그렇게 해석하니까 자연은 예술과 닮은꼴이었다. 예술에 대해 최초로 유용한 정의를 내린 세익스피어도 “예술은 보잘것없는 것도 귀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리어왕)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는가. 화가 밀레 또한 “예술이란 평범한 것들을 숭고한 감정에 따라 다루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누군가가 “의술은 사람의 몸을 치료하고, 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치료한다”고 했는데, 자연이야말로 그 둘 다, 즉 사람의 몸과 마음을 몽땅 치료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홍콩의 미남 배우 장국영이 “마음이 피곤하여, 더는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는데, 아, 왜 그는 천사가 이끄는 대로 숲으로, 자연의 품으로 가지 않았을까. 자연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고통을 치료해 주는, 마음속 엄마 같은 존재인데…….

아기 숨결 같은 작은 바람에 외손녀의 나스르르한 앞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리고 땅거미가 잿빛 밀물처럼 밀려와 숲속의 공기와 흙길, 온갖 사물들을 푸른 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하자 이내 어웅하게 어둠이 깃들었다.

만산동 캠핑장은 관리가 철저하다. 밤 9시 30분이 되면 소등을 해야 하고 말소리를 작게 해야 한다. 가족은 텐트로 들어가 잠을 청했는데, 초교 4학년인 손녀와 단둘이 데크에 나란히 누웠다. 손녀가 말했다. “하비(할아버지). 별이 많이 떴네. 별똥별을 보면 좋겠다!”

별, 별, 별…… 퍼뜩 바로 그때,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목동과 스테파네트 아가씨의 사랑 이야기(퐁스 도데, ‘별’)였다. 주인공 목동처럼 “자랑스러운 마음이 벅차오른 상태로” 양 떼를 재우듯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세상 어느 양보다 소중하고 순결한 어린 양, 뤼르봉 산봉우리 위로 날아다닌다는 에스텔 천사를 닮은 어린 손녀에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리사랑의 크기가 남달라서일까. 아니면 명정(酩酊)의 뒤 끝이 맑아서였을까. 유난스레 내 언변에 편자가 박혀 늙은 고양이 달걀 굴리듯 이야기가 평소와 다르게 술술 흘러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사춘기가 내일모레인 손녀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쑥떡 같은 이야기를 찰떡같이 알아들으며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혼”이라는 유성(별똥별)은 끝내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스테파네트 아가씨와 목동처럼 가슴에 성호를 그을 필요도 없었다. 대신 “저 숱한 별 중에 가장 곱고, 가장 빛나는 별님 하나가 내 어깨 옆에 내려앉아” 가족의 인연을 맺었다는 사실이 그저 고맙고 고마울 따름이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시원하게 흘러가는 계곡물은 유난히 맑은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늘에선 별들이 “7년마다 한 번씩 결혼”하고 있을 것이었다.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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