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토룡(土龍)의 꿈

아파트 뒷산으로 연결되는 산책로에 지렁이 한 마리가 부지런히 어디론가 가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길가에 심어 놓은 꽃나무에 물을 주기 위해 설치한 우물가 배수로는 매우 습해서 토룡이 살기에 아주 좋았다. 배수로 옆에 자라고 있는 코스모스, 원추리, 패랭이꽃은 토룡이 살기 좋게 적당히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 더 바랄 게 없었다.
'이곳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야. 옆에 우물이 있으니 사시사철 물이 떨어질 염려도 없고, 꽃들이 향기를 풍기며 늘 함께 있으니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없을 거야. 나는 참 운이 좋은 지렁이야.'라고 생각하며 토룡은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았다. 며칠 전 흠뻑 내린 비로 토룡은 하루가 다르게 몸집이 커갔고, 열심히 흙을 일구며 땅을 비옥하게 했다.
몸집이 커 가면서 토룡의 생각도 커갔다. 그리고 왠지 이 우물가 주변이 옹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냄새도 나고 청결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주변에 있는 다른 지렁이들을 보면 자신보다 몸집이 왜소해서 함께 지낸다는 게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토룡은 또 생각했다. '나는 다른 지렁이들과는 달라, 이 배수로는 내가 살 곳이 아니야. 처음부터 좀 더 넓은 곳에서 시작해야 했어. 아! 참 답답하다.' 토룡은 언젠가 기회가 오면 꼭 큰 물가에 나가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고 마음껏 돌아다녀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화창한 여름날 새벽녘, 토룡은 이제 이 옹색한 배수로를 떠나기로 결심을 굳혔다. 토룡은 앞에 있는 산책로를 가로지르면 큰 개울이 나오리라 생각했다. 토룡이 크게 기지개를 켜자 몸이 한 뼘은 늘어나는 것 같았다. 건너편까지 해가 뜨기 전에 충분히 건너갈 수 있다고 자신하며 습지를 떠났다.
토룡의 장도를 축하해 주는 듯 매미가 힘차게 울기 시작했다. 매미의 울음소리에 맞추어 토룡은 몸을 쭉쭉 늘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길 위로 올라서자 깨알만 한 개미 몇 마리가 시비를 걸었다. 정말 보잘것없는 놈들이라고 무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점점 수없이 많은 개미가 앞을 가로막고 덤벼든다.
개미들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가려는 토룡의 몸에는 어느새 많은 상처가 났다. 토룡은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마음이 급해졌다. 몸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고 개미들의 공격은 더욱 치열해졌다. 어느덧 동산 위로 고개를 들어 올린 여름의 아침 해가 서서히 땅을 달구어 올 때, 매미들의 울음도 목이 찢어질 듯 처절하게 높아져 갔다.
토룡은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래 친구들과 함께 살던 배수로가 좋았는데, 그곳에서는 감히 보잘것없는 개미가 달려들지도 못했는데, 이 뙤약볕 아래서는 정말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잖아.' 괜스레 바깥세상으로 나왔다는 후회에 토룡의 몸은 자꾸만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개미들은 이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졌고, 토룡은 꿈틀거릴 기운조차 없었다. 함께 살던 다른 지렁이들, 늘 살갑게 대해 주던 꽃들이 생각났다. 조금 더 잘해 주었어야 했는데, 좀 더 열심히 흙을 일구어 주어야 했다는 부질없는 후회와 함께 기억은 가물가물 흐릿해져만 갔다.
토룡은 하늘로 승천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자신의 몸을 개미들에게 아낌없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현실인지 아닌지 종잡을 수 없다. 토룡의 몸은 이제 땅바닥에 들러붙어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토룡은 그렇게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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