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수장고에서 만나는 예술가들의 ‘필적’…펜끝에 스민 고뇌와 삶, 기록 그 이상의 가치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디지털 기기로 1초 만에 텍스트를 전송할 수 있는 시대다.
근현대 격동기를 살았던 예술인들의 감정과 고민이 스며든 손글씨를 마주하는 순간, 예술가이자 인간으로서 그들의 치열한 삶은 물론 생생한 내면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이밖에도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예술가들의 필적은 그들의 예술세계와 삶의 고민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무용가 김상규의 애환부터 연극인 이필동 열정까지
예술인들의 감정과 고민 스며든 손글씨 눈길

디지털 기기로 1초 만에 텍스트를 전송할 수 있는 시대다. 그런데 구시대 유물 같은 '손글씨'가 주목받는다. 손글씨의 가치는 효율성 너머의 영역에 있다.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손으로 직접 쓴 글씨가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다.
대구예술발전소 3층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열린수장고에서 열리고 있는 '필적, 예술가의 내면 풍경'展(전)이 오는 12월 31일까지 관람객들을 창작의 고뇌와 삶의 흔적으로 초대한다.
◆ 낡은 원고지가 쏟아내는 예술가의 '생생한 육성'
낡은 원고지에, 때로는 빛바랜 종이조각에 남겨진 글씨들이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근현대 격동기를 살았던 예술인들의 감정과 고민이 스며든 손글씨를 마주하는 순간, 예술가이자 인간으로서 그들의 치열한 삶은 물론 생생한 내면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라, 시간이 켜켜이 쌓인 예술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전시다.
전시장에서는 대구경북 출신 또는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예술가들의 자필 원고 20여 점을 전시 중이다. 아동문학가 윤복진·김성도·최춘해, 성악가 이점희, 작곡가 김진균·우종억·임우상, 합창지휘자 장영목, 무용가 김상규, 연극인 이필동 등 다양한 분야 예술가들의 손글씨를 통해 지역 문화예술사의 깊은 맥락을 짚어볼 수 있다.
◆ 시대를 뛰어넘는 창작의 열정

수장고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무용가 김상규(1922~1989)의 글씨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안동대에서 후학을 양성했던 그가 발표회를 앞두고 쓴 인사말 원고에는 "조센징이란 멸시 속에 '이시이 바꾸'의 문을 두드린 것이 18세 때였습니다"라는 글귀가 또렷하게 남아 있어, 일제강점기 예술가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직도 무용예술이 지닌 난제 속에서 자기 마음의 자유로운 표현이 아쉽기만 하는 몸부림에서 다시 막을 열어봅니다"라는 대목에서는 무용을 향한 그의 열정이 시대를 뛰어넘어 다가온다.
대구지역 1세대 남성무용가였던 김상규는 일본 유학 후 1946년 김상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해 후학 양성에 힘썼다. 경북무용가협회를 결성했으며 영남대 전신인 청구대, 경북대, 안동교육대에 출강하는 등 지역 무용 발전에 힘썼다.

대구 연극의 초석을 다진 배우이자 연출가 이필동(1944~2008)이 연극에 대한 열정을 적은 글도 눈에 띈다. 영화감독 이창동의 형인 이필동은 한국 현대 연극사에서 무대미술과 축제 기획의 토대를 닦은 인물이다. "연극은 배우예술이다. 배우의 연기야말로 연극예술의 핵심이며 그런 뜻에서 배우는 연극예술의 꽃이라 할 수 있다"는 그의 글씨에는 연극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이 엿보인다. '살아 있는 인간 배우→살아 있는 관객'이라 적힌 메모는 배우와 연출가로서 평생을 바친 그의 예술 철학을 묵직하게 증명한다.
전시의 또 다른 발견은 한국 아동문학의 기틀을 닦은 선구자 김성도(1914~1987)의 원고다. 영국 작가 로알드 달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번역한 그의 손글씨 원고는 1970~80년대에 480장 분량으로 번역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출판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빛을 보지 못했다. 페이스 자크가 삽화를 그린 영국 초판본을 번역한 이 원고는 한 작가의 숨은 노력과 열정을 생생하게 전한다. 이밖에도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예술가들의 필적은 그들의 예술세계와 삶의 고민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남지민 담당은 "예술가들의 자필 원고는 단순한 기록적 가치를 넘어선다"며 "한 사람이 예술가로서 걸어온 발자취와 정신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 공간에서 관람객들이 진정한 내면의 풍경을 마주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