뚫린 옥상·열린 창문… '자살 배리어'에 무관심한 '자살 공화국'
2차 피해 큰 투신, 방지책 필수적
해외선 옥상 출입·창문 규제 도입

8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의 한 고층 건물 옥상. 출입문에는 '주민의 안전과 범죄 예방을 위해 외부인 출입을 금지한다'는 관할 경찰서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경고문이 무색하게 옥상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비상계단을 통해 손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난간도 성인 가슴 높이인 1.2m 안팎에 불과했다. 올해 들어 일대에서 투신 사건이 잇따르자 구청과 경찰이 지난 5월 집중 단속에 나섰지만 넉 달이 지난 지금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10일은 세계보건기구(WHO)가 2003년 지정한 '세계 자살예방의 날'이다. 우리나라도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을 2011년 제정하는 등 문제 해결에 나름 애쓰고 있지만 '자살 공화국' 오명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자살 사망자는 잠정 1만4,439명으로 전년(1만3,978명)보다 3.3% 늘었고, 2011년(1만5,906명) 이후 13년 만에 최고치였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인 자살률도 28.3명으로 2013년(28.5명) 이후 가장 높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표준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에서도 한국은 24.8명(2023년 기준)으로 OECD 평균 자살률 10.7명의 2배를 훌쩍 넘고, 38개 가입국 가운데 2017년(리투아니아)을 빼고 20년 넘게 1위다.

우리나라는 자살예방을 위한 제도적 접근이 취약하다. 특히 투신의 경우 목맴이나 가스중독 등에 비해 건축 규제 등으로 예방이 가능한데도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 투신은 낙하로 인한 2차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반드시 별도 관리가 필요하다.
투신이 자주 발생하는 장소는 건물 옥상이다. 국내 건축법 시행령은 5층 이상 제2종 근린생활시설에 옥상 피난용 광장을, 11층 이상 건물에는 헬리콥터 구조 공간 설치를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옥상 활용 방법만 규정할 뿐 평상시 접근을 제한하는 조항이 없다는 지적에 2021년 옥상 출입문에 자동개폐장치 설치를 의무화하도록 시행령이 개정됐다. 그러나 대상이 16층 이상·바닥면적 5,000㎡ 이상 다중이용 건축물과 연면적 1,000㎡ 이상 공동주택으로 제한되고 기존 건물에는 적용되지 않아 실효성이 낮다.
해외에서는 옥상 출입을 법으로 엄격히 통제한다. 싱가포르의 경우 도시재개발청(URA) 가이드라인에 "철근콘크리트 건물 옥상은 유지·보수 목적 외에는 출입할 수 없다"고 못 박아놨다. 건물 소유주와 건축가는 잠금장치 등 출입 차단 조치를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 옥상을 테라스나 조경 정원 등으로 활용해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게 하려면 한국과 달리 제안서를 별도 제출해 URA 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 절차도 까다롭다. 2014년 싱가포르 주거 밀집 지역 토아파요의 한 건물 옥상에서는 그래피티가 발견됐다는 이유로 경찰이 출입 경위 등 수사에 나서기도 했다.
국내 아파트 등 고층 건물은 창문 등에 투신을 방지할 만한 장치도 부족하다. 창문에 1.2m 이상의 난간 등 추락 방지를 위한 시설물을 설치하도록 규정할 뿐이다. 반면 스웨덴은 관련 법에 따라 어린이가 있을 수 있는 모든 공간에서는 창문 하단이 1.8m 미만이면 개방 폭을 제한하는 안전장치를 설치해야 하며, 창문 하단이 0.6m 미만인 발코니 문에는 어린이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잠금장치가 있어야 한다. 아이들 안전을 지키기 위한 조치지만 동시에 자살예방 역할도 한다.
전문가들은 투신 위험을 낮추려면 자살을 방지하는 건축·설계 즉, '자살 배리어'를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택수 한국자살예방센터장은 "투신 충동을 느낄 때 '여기는 올라갈 수 없네' '잠겨 있네' 등 순간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물리적 대응을 강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건축 규정을 세밀하게 다듬어 지키지 않으면 허가하지 말고 건물 소유주나 건축업계가 난간 높이 상향 등 자발적인 노력을 할 경우 인센티브나 세액 공제 등 지원책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허유정 기자 yjheo@hankookilbo.com
김나연 기자 is2n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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