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만리]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 / 배창환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 / 배창환
고등학교 다닐 때였지/ 노가다 도목수 아버지 따라/ 서문시장 3지구 부근/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할매술집에 갔지/ 담벼락에 광목을 치고 나무 의자 몇 개 놓은 선술집/ 바로 그곳이었지/ 노가다들이 떼거리로 와서 한잔 걸치는 곳/ 대광주리 삶은 돼지다리에선 하얀 김이 설설 피어올랐고/ 나는 아버지가 시켜 주신 비곗살 달콤한 돼지고기를 씹었지/ 벌건 국물에 고기 띄운 국밥이 아닌/ 살코기로 수북이 한 접시를(!)// 꺽꺽 목이 맥히지도 않고/ 아버지가 단번에 꿀떡꿀떡 넘기시던 막걸리처럼/ 맥히지도 않고, 이게 웬 떡이냐 잘도 씹었지/ 뱃속에서도 퍼뜩 넘기라고 목구녕으로 손가락이 넘어왔었지// 식구들 다 데리고 올 수 없어서/ 공부하는 놈이라도 실컷 먹인다고/ 누이 형제들 다 놔두고 나 혼자만 살짝 불러 먹이셨지/ 얼른 얼른 식기 전에 많이 묵어라시며/ 나는 많이 묵었으니까 니나 묵어라시며// 스물여섯에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남몰래 울음 삼켰지/ 돼지고기 한 접시 놓고 허겁지겁 먹어대던 그 날/ 난생 처음 아버지와의 그 비밀 잔치 때문에/왜 하필이면 그날 그 일이 떠올랐는지 몰라도/ 지금도 서문시장 지나기만 하면 그때 그 선술집 가서/ 아버지와 돼지고기 한번 실컷 먹고 싶어 눈물이 나지/ 그래서 요즘도 돼지고기 한 접시 시켜 놓고 울고 싶어지지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2012, 작은 숲 출판사)
현대시 속에서 7·80년대 한국의 아버지상(像)을 가장 잘 형상화한 시를 들라면, 배창환 (1955~, 경북 성주 출생) 의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이 떠오른다. 보릿고개를 지나 도시화로 막 접어든 그때, 집 집마다 밑바닥 부모의 삶은 오직 '장남'의 성공에 목매달았다. 가난한 농가에는 소를 팔아 자식을 대학에 넣는 것이 한 가닥 희망이었다. 이 시는 아버지와 아들의 끈끈한 피의 내림을 감동적으로 그렸다. "공부하는 놈이라도 실컷 먹인다고/ 누이 형제들 다 놔두고 나 혼자만 살짝 불러 먹이셨지/ 얼른 얼른 식기 전에 많이 묵어라시며/ 나는 많이 묵었으니까 니나 묵어라시"던, 아버지의 심중은 어떠했을까. 아득하고 아득한, 그 서늘한 당신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 젊은 시인은 다 이해하지 못했나 보다. 수십 년 지난 오늘 "서문시장"을 지나다가 불현듯, 그때 그 아버지의 뜨거운 정(情)에 사무쳐 "눈물"이 울컥한다. 몰래 혼자만 먹은 '돼지고기 한 접시'가 다른 형제에 대한 미안으로 번져, 시인의 흉중에 회한으로 남는다. '나는 많이 묵었으니까 니나 묵어라시며' 한 접시 살코기를 수북이 아들 앞에 놓고, 허겁지겁 맛있게 먹는 당신의 든든한 기둥(장남)을 흐뭇하게 지켜보았을 시인의 선친을 생각하니, 왠지 삶이 뜨뜻해진다. 하여, 「서문시장 돼지고기 선술집」을 읽고 있노라면, 다닥다닥 붙은 하꼬방에 연탄 밥을 해 석유 곤로에 끓인 된장찌개를 상(床)에 올려놓고, 온 가족이 흰 이빨을 드러내고 웃던, 그 시절 그 풍경 그 사람들이 못내 그립기도 하다.
김동원(시인·평론가)
Copyright © 대구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