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판 사라진 탑골공원… 떠도는 노인들 “술꾼 행패가 더 심각” [밀착취재]
오후 시간대 노인 10여명 ‘한적’
“산이나 다른 공원으로 흩어져”
대신 인근 종묘광장공원 ‘판’ 깔려
100여명 가까이 모여 구경·훈수
“국밥·술 내기 매출 도움됐는데”
일대 상인들도 불만 목소리 커
9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에는 이른 아침부터 100명에 가까운 노인들이 모였다. 노인들 사이로 초등학생 4명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자리를 차지하자 시선이 일제히 쏠렸고, 외국인 커플이 원각사지 10층 석탑 앞에 서자 이를 두고 대화하는 노인들 모습도 보였다. 오전 11시가 되면서 담벼락을 둘러 무료 급식소 입장 줄이 길게 늘어섰고, 정문에는 노인 수십명이 도시락을 받기 위해 한 줄로 도열했다. 이들 일부는 공원 근처에서 식사했고, 나머지는 도시락을 받아들고 어디론가 향했다. 오후가 되자 탑골공원에 남은 노인은 1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이날 오후 탑골공원에서 약 700m 떨어진 종묘광장공원에서는 80여명이 바둑을 즐기고 있었다. 바둑판을 앞에 두고 머리를 싸맨 ‘선수’들과 구경꾼들은 “기가 막히게 살아나네”, “그렇게 두면 안 되지”라며 추임새를 넣었다. 탑골공원에서 장기를 금지당한 이들이 일부 이곳으로 합류했다. 김한덕(85)씨는 “탑골공원에서 쫓겨난 후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다”며 “일부는 복지관으로 갔는데 주말에 열지도 않을뿐더러 구경이나 훈수 두는 것도 못 해 다들 안 간다”고 푸념했다.
구청 등에 따르면 서울시가 탑골공원 인근 서울노인복지센터에 장기실을 마련했지만 단속 이후 이용자가 크게 늘지 않았다. 이들은 복지관이나 20여년 전부터 조성된 서울 종로구 종묘광장공원에서 바둑을 두거나 콜라텍이나 서울 시내 다른 공원 등으로 흩어진 것으로 보인다.
금지 조치와 단속에 대해 노인들은 “탑골공원 문제는 주취자 때문”이라고 반발했다. 경찰은 지난해 종로경찰서에 접수된 112 신고 5만7156건 중 탑골공원 북문 반경 50m 이내는 1720건이었다고 밝혔다. 20여년째 종묘공원에서 돗자리와 바둑판을 제공하고 인당 하루 이용료를 1000원씩 받고 있는 김모(70)씨는 “탑골공원에서는 노숙인들이나 주취자가 장기판을 엎는 식으로 갈등을 빚어왔던 것”이라면서 “이곳에선 성격을 파악하고 대전을 붙이고, 음주를 제한하니 질서가 유지된다”고 말했다.
탑골공원 인근 상인들도 불만의 목소리를 냈다.
돼지국밥집에서 20년 근무한 김모(62)씨는 “매출이 4분의 1 정도 빠졌다고 봐야 한다”며 “할아버지들이 장기 두면서 국밥 한 그릇, 술 한 잔 내기하는 게 매출에도 도움이 됐다”고 했다. 탑골공원 북문에서 200원짜리 커피를 팔면서 장기판을 빌려줬던 박손서(75)씨는 “수십년간 부산, 인천을 비롯해 전국구에서 노인들이 모여든 곳”이라면서 “장기 두는 노인들은 길에서 행패를 부리지 않는데, 여가 문화를 규제할 것이 아니라 노숙인을 관리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종로구청은 난감하다는 입장이다. 구청 관계자는 “노숙인 문제도 있지만 게임에 심취한 노인들이 담벼락에 노상방뇨 하는 일은 2001년부터 지속해서 있어 왔다”면서 “멀지 않은 곳에 대안 공간을 연내로 마련하려 실무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글·사진=소진영 기자 so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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