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바위 글씨의 비밀 풀렸다…산고수장·백운대·선유동 주인공 확인”
이만유 향토사연구가 “지역 문화사 정통성 세우는 과정”

경북 문경의 명승지마다 남아 있는 바위 글씨, 이른바 각자(刻字)는 오랫동안 지역 문화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선유구곡, 봉암사, 구곡원림에 새겨진 글씨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명확히 확인되지 않아 '전설'과 '추측'만 난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문헌 고증과 판독을 통해 그 주인공이 속속 밝혀지면서 왜곡된 전승이 바로잡히고 있다.
향토사 연구가 이만유 씨는 "각자는 단순한 글씨가 아니라 시대의 인물들이 남긴 철학과 정신의 기록물"이라며 "그 주인을 제대로 밝혀내야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선유구곡 학천정 옆 바위에 새겨진 '산고수장(山高水長)'이다. 희미한 글씨 탓에 수십 년간 판독조차 쉽지 않았지만, 최근 박열의사기념관 운영위원장이자 ㈜예문관 박성진 대표의 노력으로 실마리가 풀렸다.
글 옆에 새겨진 '侄東寧君 以景慕之 諒刻此四字 乃丙熙敬書(질동녕군 이경모지 양각차사자 내병희경서)'라는 문구를 풀이하면 '숙질인 동영군이 도암 이재 선조에 대한 경모의 뜻으로 청하니, 병희가 공경의 마음을 담아 글씨를 썼다'는 의미다.
이에 따라 '산고수장'을 새긴 이는 우봉이씨 가문의 명필 이병희(李丙熙, 이병도의 형)의 작품임이 확인됐다.

봉암사 계곡 양산동천의 '백운대(白雲臺)'는 오랫동안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의 글씨로 전해져 왔다. 그러나 호고와 유휘문(柳徽文)의 '호고와문집', 눌재 박상(朴祥)의 '눌재선생집', 주세붕의 '무릉잡고' 등 문헌 검토 결과, '백운대'라는 이름을 붙인 주인공은 조선 전기의 학자 허암 정희량(鄭希良, 1469~1502)으로 드러났다. 그동안 회자되던 '최치원 설'은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했음이 확인된 셈이다.

문경의 대표적 비경 선유구곡에는 굽이마다 이름이 새겨져 있다. 특히 '선유동(仙遊洞)'을 비롯한 각자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오랫동안 설만 무성했는데, '곡구원기' 기록을 통해 징사 신필정(申弼正, 1656∼1729)이 글씨를 쓴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일부 서체가 서로 달라, 그의 아들 신사박이 직접 새겼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또는 여러 인물이 참여했는지는 여전히 논란으로 남아 있다.
이번 고증으로 학천정, 백운대, 선유구곡 등 주요 각자의 주인공이 밝혀졌지만, 여전히 '야유암', '취적대', '명월청풍 고산유수' 등은 미제로 남아 있다.

이만유 연구가는 "각자의 주인을 밝히는 일은 단순한 학술적 호기심이 아니라 지역 문화사의 정통성을 세우는 과정"이라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고증과 보존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경 곳곳에 새겨진 석각은 옛 선비와 문인들의 정신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문화적 증거물이다. 주인공의 실체가 드러날수록 그 가치는 더욱 높아지고, 지역 문화사의 맥락 또한 선명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