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이야기] 메밀과 온도가 빚어낸 음식 ‘평양냉면’…“그대로 먹어도 꽉 찬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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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에도 평양냉면의 인기가 대단했다.
"평양냉면이 서울로 오면서 담박한 맛은 없어지고 간장국이 짭짤히 엉킨 서울식 미각으로 변했다"는 1936년 6월4일자 '조선중앙일보' 기사에 국물 온도가 기록돼 있었다면 어땠을까.
요리사 한명이 운영하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작은 식당 '색다른면'에서는 메밀과 온도가 만들어내는 맛의 균형점이 어디인지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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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수확한 메밀이 주재료
단백질 함량 높고 루틴이 풍부
온도 민감…과거엔 겨울에 즐겨
국물과 양념에 따라 맛도 다양
물냉면에 구운 베이컨도 ‘별미’

올여름에도 평양냉면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러나 평양냉면은 천재 요리사 한명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니다. 음식의 발명은 식재료와 환경을 바탕으로 한다. 그렇게 보면 냉면을 만든 것은 사람이 아니라 메밀이다.
메밀은 단백질 함량이 14%로 다른 곡물보다 영양 가치가 뛰어나고 혈관 건강에 도움이 되는 항산화물질 루틴이 풍부한 음식이다. 파종 후 두달이면 수확이 가능한 단기작물이란 장점도 있다. 하지만 메밀은 온도에 민감하다. 여름에 거둔 메밀은 오래 두기 어렵다. 쌀이나 밀보다 지질 함량이 약 2배 많아 고소한 향은 뛰어나지만 쉽게 변질되기 때문이다. 냉장 설비와 기술이 부족했던 예전에는 늦가을에 수확해 겨울 동안 저장하는 것이 적절했다.
국수로 뽑을 때도 온도가 중요한 변수다. 메밀 속 지질은 쉽게 분해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헥산알 같은 휘발성 향 성분은 열에 특히 약하다. 제분 과정에서 온도가 조금만 올라가도 특유의 고소한 향이 날아가버린다. 삶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2∼3분이면 다 익지만 타이밍을 놓치면 금세 퍼져버린다. 건져낸 면은 곧장 얼음물에 씻어야 한다. 그래야 여열로 더 익는 것을 막고, 전분기를 씻어내 달라붙지 않게 할 수 있다. 이 과정이 바로 냉면의 핵심이다. 차가운 물에 면을 씻었으니, 차갑게 식힌 국물에 담가 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 게다가 그 국물에 필요한 얼음이나 동치미는 겨울에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냉면은 그래서 겨울 음식이었다. 추운 날 온돌방에 앉아 살얼음 뜬 동치미국에 국수를 말아 먹는 즐거움은, 차가움과 따뜻함의 극적인 대비 속에서 완성됐다. 오늘날 우리는 냉장고 덕분에 사시사철 냉면을 즐기지만, 그 원형은 메밀과 온도가 함께 빚어낸 계절 음식이었다.
메밀 이야기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만든 면이 어떤 국물과 온도를 만나는가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매콤 달콤한 양념장에 비벼 먹을 때는 부드럽고, 차가운 국물에 말아 먹을 때는 단단하면서도 탄력이 느껴진다. 메밀의 결합력을 보완하기 위해 넣는 전분 또는 밀가루의 함량에 따라서도 조직감은 크게 달라진다. 여기에 국물의 온도가 더해지면 또 다른 맛의 변주가 생겨난다. 2016년 미국 예일대학교 연구에 따르면 감칠맛은 온도가 내려갈수록 약해졌지만, 짠맛은 10℃에서 강하게 느껴졌다. “평양냉면이 서울로 오면서 담박한 맛은 없어지고 간장국이 짭짤히 엉킨 서울식 미각으로 변했다”는 1936년 6월4일자 ‘조선중앙일보’ 기사에 국물 온도가 기록돼 있었다면 어땠을까. 냉면 맛이 달라진 까닭은 서울과 평양의 국물 온도 차이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요리사 한명이 운영하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작은 식당 ‘색다른면’에서는 메밀과 온도가 만들어내는 맛의 균형점이 어디인지 확인할 수 있다. 베이컨으로 낸 육수에 동치미 국물을 섞고 메밀 함량 88.4%의 메밀면을 담아낸다. 식초나 겨자를 넣지 않고 그대로 먹어도 꽉 찬 맛이다. 프랑스식 메밀전인 메밀 갈레트에 베이컨을 얹은 것보다 평양식 물냉면과 구운 베이컨이 더 잘 어울린다는 사실은 한입만 맛봐도 바로 알 수 있다. ‘심심하다’는 맛 표현에 조금 질린 사람이라면 메밀의 새로운 얼굴을 만나기 위해 들러볼 만하다.

정재훈 약사·푸드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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