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팔리고, 불타고, 일손도 없다… ‘와인제국’ 美 캘리포니아, 3중고에 ‘붕괴’
LVMH마저 나파밸리 ‘뉴턴 빈야드’ 매각
캘리포니아 와인 가격 지수, 2년 새 15.3% 하락
한때 ‘신의 축복을 받은 땅’으로 불리던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이 고사 위기에 처했다. 술을 덜 마시는 소비자, 해마다 되풀이되는 산불, 수확기마다 비는 일손까지 ‘삼중고’가 겹쳤다. 수확을 포기한 채 포도밭을 갈아엎는 농가가 속출하고, 50년 넘게 자리를 지킨 유서 깊은 와이너리마저 문을 닫는 등 와인 명가라는 간판이 무색해졌다.

전 세계 금융 시장에서 거래되는 캘리포니아 주요 와인 거래 가격을 지수화한 ‘리벡스 캘리포니아 와인 50’은 8일 기준 최근 1년 동안 10.5% 하락했다. 2년으로 놓고 보면 하락폭은 15.3%로 더 커진다. 이 지수는 세계에서 가장 공신력 있는 와인 관련 시장 지표다. 영국 런던 와인 거래소 ‘리벡스(LIVEX·London International Vintners Exchange)’가 산출한다. 2004년 1월 와인 가격을 100으로 놓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거래하는 캘리포니아 와인 50개의 현재 값을 비교해 지수화한다. 집계 대상은 국내가 500만원 이상을 호가하는 ‘스크리밍 이글’, 전설적인 미국 와인 양조가 로버트 몬다비와 명문가 로스차일드가 함께 만든 ‘오퍼스 원’, 2006년 ‘파리의 심판 30주년 기념 시음회’에서 내로라하는 프랑스 와인 브랜드를 모두 누르고 1등을 차지한 릿지 몬테벨로 등이다. 2022년 400을 웃돌던 이 지수는 올해 300선 밑에서 움직이고 있다.

최고급 와인마저 비껴가지 못한 시장 침체는 저렴한 일상 소비용 와인에 재앙과 같았다. 이달 초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와인 재배 농가들은 올해 포도 수확을 상당 부분 포기할 전망이다.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수십만 톤이 넘는 포도가 사들일 사람을 찾지 못해 덩굴에 매달린 채 썩어갈 것으로 보인다. 주 전역에서 1억 6200만㎡(약 4900만평) 포도밭이 폐쇄되거나 아예 버려졌다. 몬터레이 카운티에서 51년간 포도 농장을 운영해 온 ‘밸리 팜 매니지먼트’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폐업을 결정했다. 이 지역은 국내에서도 저렴하지만, 품질이 좋은 생산지로 인기가 많은 편이다. 이 회사 대표 제이슨 스미스는 언론 인터뷰에서 “지난해까지 열 병을 생산하면 그 중 아홉병은 팔렸는데, 올해 판매율이 40%로 급락했다”며 “감정적으로 힘든 결정이지만, 숫자만 보면 쉬운 결정이었다”고 했다.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생산량이 많은 로디 지역 상황은 더욱 처참하다. 미국 농무부(USDA)에 따르면 로디는 주 전체 와인용 포도 생산량의 20.5%를 담당한다. 로디에선 지난해와 올해 40만톤이 넘는 포도가 나무에 매달린 채 버려졌다. 채산성이 떨어지면서 포도나무 가운데 20%는 뿌리채 뽑혔다. 로디 와인협회 스튜어트 스펜서 이사는 ABC 인터뷰에서 “지난해 수확하지 않은 포도가 밭에서 그대로 썩어 검게 변했다”며 “수확해 봐야 인건비도 안 나오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수요 붕괴다. 여론조사 기업 갤럽에 따르면 올해 조사에서 “현재 술을 마신다”고 답한 미국 성인 비율이 54%로 1939년 첫 조사 이후 86년 만에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공신력 있는 주류 리서치사 IWSR은 미국 전체 주류 소비량이 2023년 −2.6%, 지난해 −1%로 최근 2년 연속 줄었다고 밝혔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강력한 관세 정책은 불이 난 데 기름을 붙였다. 4월 관세 전쟁 발발 이후 유럽산 코르크와 프랑스산 오크통, 중국산 유리병 등 와인 제조에 쓰이는 모든 수입자재에는 15% 추가 관세가 붙었다. 이후 가뜩이나 비싼 편이었던 캘리포니아 와인 가격 경쟁력은 더 떨어졌다. 특히 캘리포니아 와인 주된 판매처였던 캐나다 등 주요 수출국이 미국산 주류에 보복 관세를 부과하면서 수출길마저 막혔다.
여기에 연례행사처럼 번지는 대형 산불은 와인 산업 기반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2020년 약 2억 7000만㎡(약 8200만평)를 태운 대형 산불에 이어, 지난달 재차 발생한 산불은 고급 와이너리가 즐비한 캘리포니아 핵심 산지 나파밸리에 6500만 달러(약 900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를 남겼다. 산불은 재산 피해보다 포도 재배 전 영역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불에 포도나무가 직접 타지 않더라도, 포도 열매와 숙성 중인 와인이 연기를 머금어 와인 맛이 변하는 ‘스모크 테인트(smoke taint)’ 피해가 더 치명적이다. 한 와이너리 대표는 지난달 CBS 인터뷰에서 “산불 후 재떨이를 핥는 맛이 나 2년 치 와인을 전부 하수구에 쏟아부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최근에는 수확철을 앞두고 이민법 강화에 따른 노동력 부족 위기까지 닥쳤다. 포도 농사는 9~10월 사이 수확기에 집중적으로 일손이 필요하다. 보통 와이너리들은 이 시기에 자원봉사, 비정규직 형태로 일시적인 노동력을 확보한다. 올해는 단속 강화로 인력 공백이 이어지고 있다. 캘리포니아 지역매체 KQED 방송은 캘리포니아 농업 인력 절반 이상이 서류가 미비한 이민자라고 전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민세관단속국(ICE) 예산을 대폭 늘리며 단속을 강화하자, 수확기에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와이너리가 속출하고 있다. 지역 비영리단체들이 나서 돕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마이클 카이저 와인아메리카 부사장은 “포도를 딸 사람이 없으면, 포도는 그냥 덩굴에서 썩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3년 전만 하더라도 캘리포니아 와이너리는 최고 투자처로 각광을 받았다. 국내 재벌들까지 손을 뻗칠 만큼 매력적인 매물이었다. 2022년 신세계는 캘리포니아 유명 와이너리 셰이퍼 빈야드를 당시 3000억원(2억5000만달러)에 사들였다. 와이너리 연간 순이익 기준 28배에 달하는 높은 금액이었다. 곧이어 한화솔루션이 미국법인 한화솔루션USA홀딩스코퍼레이션을 통해 세븐 스톤즈라는 나파밸리 부티크 와이너리를 사들였다. 한화가 와이너리를 사들인 가격은 3400만달러(약 445억원) 정도였다.

그 시기가 캘리포니아 와인 시장의 마지막 황금기였다. 2022년을 정점으로 대형 거래는 사라졌다. 반대로 팔기 위한 매물만 잔뜩 쌓였다. 지난해 7월 기준 나파와 소노마 두 지역에서만 나온 와이너리, 상업 포도밭 관련 매물이 각각 36건, 58건에 달한다. 이 중에는 나파 ‘바인야드29′(6500만달러), 소노마 ‘메드록 에임스’(4400만달러)처럼 평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유명 와이너리도 있다.
프랑스 사치품 그룹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마저 2001년 인수해 24년 동안 소유했던 나파지역 유명 와이너리 ‘뉴턴 빈야드’를 지난 5일 개인 투자자에게 매각했다. 이 와이너리는 2020년 산불로 포도밭 93%와 판매를 위해 숙성 중이던 와인 대부분을 잃었다. LVMH는 올해 2월 이 와이너리 운영을 완전히 중단하고, 새 소유주를 구하기 시작했다. 와인 부동산 전문기업 뱅트루 관계자는 “10여 년 만에 가장 많은 포도밭·와이너리 매물이 시장에 나와 있다”며 “2024년 중반 이후 나오는 매물은 많은데, 성사된 거래는 거의 없다”고 했다.
와인업계 전문가들은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 위기가 단순히 경기 순환에 따라 겪는 일시적 침체가 아닐 수 있다고 했다. 기후 변화와 젊은 세대 소비 취향 변화는 거스를 수 없는 뉴 노멀(new normal·새 표준)이다. 실리콘밸리은행 와인 부문 대표 롭 맥밀란은 올해 연례 보고서에서 “와인 산업은 더 이상 과거 방식에 안주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그는 “기후에 더 잘 견디는 새로운 포도 품종을 도입하고, 젊은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세우지 못하는 와이너리는 결국 도태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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