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목포 개항, 근대교육의 교문 목포북교초등학교 (하-1) [문화발원지 남도 학교기행]

이건상 기자 2025. 9. 8.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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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교동 예술인 골목 벽화. 좌로부터 남농 허건, 박화성, 김우진, 김현, 차범석

#북교동 랩소디

며칠 전, 아는 이로부터 자신의 성장기 북교동살이를 전해 들었다. 아주 짧은, 간찰(簡札) 느낌의 대화였는데, 북교국민학교(북교초등학교)를 4학년 첫학기까지 다녔노라는 얘기, 1920년대 태생인 부친께서도 (아마도 소년 김대중, 차범석 등과 함께)당시 목포제일보통학교 시절(1932~1938)을 보냈더라는 얘기, 입학금 5원이 없어서 9살에 입학했다는 등 구전 이야기였다. 엽서 1장보다 짧은 이야기였지만, 약 1백 년 전의 이야기를 설화(說話)처럼 들었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겹치는 첫눈, 설화(雪花)처럼 들었다. 나는 어느새 다시 빛바랜 근대의 어느 골목으로 돌아가 여행을 하고 있는 듯했다. 반듯한 신작로가 아닌 비대칭의 구겨진 골목이었다. 좁고 가파른 골목길, 그러기에 북교동 여행은 도보여행이어야 한다.

흐린 날이거나 바람이 출렁이는 날에는 북교동에 가야 한다. 뙤약볕 받으며 걷거나, 여우 시집가는 날 내린다는, 여우비를 맞더라도 북교동은 근대 취향의 나그네들을 환대할 것이다. 골목골목 톺아보기를 하다보면 문학평론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김현이 우직한 손을 내밀 것이고, 근대 연극의 길을 개척한 천재 극작가 김우진의 설핏한 생애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옥단이와 이난영(본명 이옥례, 1916~1965)의 흥얼거림도 고샅길에서 들려올 것이다. 일제에 저항하는 글쓰기를 통해 장편소설에 처음 도전한 여성 소설가 박화성과 교사 출신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차범석의 생가와 그를 기념하는 '작은 도서관'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단꿈에 취해 있을 김대중의 신혼집까지도.
북교동 예술인 골목 안내도

#초창기 근대학교의 어려움

1882년 시행되었던 증광시는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명성황후가 환궁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그 시험 잡과, 통역관을 선발하는 역과에 1등(급), 2등(급)도 아니고 3등(급)에 합격한 변지학(卞志學)이란 인물이 있었다.

1등은 장원 김태선(金台善)을 포함 3명, 2등은 현횡운(玄宖運)을 필두로 9명, 3등은 1위를 한 이건주(李健柱)를 포함 28명이었다. 변지학은 3등 4위였으니 선발된 총 40명 중 16위로서 그리 썩 높은 성적은 아니었다. 본명이 '지학(志學)'이고, 성인이 되면 어른들이 덕담, 아니고 덕명(德名)으로 지어 부르던 자(字)가 '이습(而習)'이었으면 '공부 좀 하라!'는 것인데, 세상 일이 뜻대로 안 되었던 모양이다.

지난 호에 이어 다시 언급하지만, 이 인물 변지학은 내가 찾아본 <관보> 기록으로는 북교초등학교 최초의 교사이다. 1896년 10월 한성사범학교 속성과 제2회 졸업시험에 30인과 더불어 합격한 그는 1년을 더 기다려 무려 나이 40세였던 1898년 3월에 무안항공립소학교 교원으로 처음 임용되었다.

1899년 5월 5급으로 승급을 했다가 1900년 3월 전라남도관찰부 공립소학교로 승진 발령되어 떠났지만, 박수를 보낼 일이다. 무안향교 양사재 시절 불비한 여건 속에서도 근대적 교육을 통해 학동들을 신세계로 이끄느라 참 고생 많았을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AI, 디지털 교육 정도의 첨단 교육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는 동래항공립소학교를 마지막으로 교직을 그만둔 모양이다. 1902년 부친상을 당한 것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무안향교 내에서 운영되었던 학교는 목포의 조선인 객주들의 모임인 무안사상회사의 김봉규(金奉珪) 등의 요청으로 1901년 10월 현 북교동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재정 문제, 교원 수급 등 어려움이 많았던 모양이다. 심지어 교원들에게 임금이 지급되지 않아 폐교 논란도 있었다. 1902년에는 어느 부교원이 임용된 지 3, 4개월이 지나도록 출근하지 않았으며, 교원 이희재는 누차에 걸친 업무 태만으로 면직되기도 하였다.

이후 1906년까지 많은 교원들의 임용과 면직(또는 해임)이 반복되었다. 그만큼 학교 운영의 어려움이 많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제국주의 강대국의 이권 개입으로 국운이 쇠하여 재정이 고갈되고, 나라가 통째 넘어가고 있는 마당에 지방교육에 대한 관심과 지원인들 오죽하였겠는가. 급식비와 교원들의 급여 등 학교 운영비는 웬만하면 지역 유지들의 기부금이나 의연금으로 충당하여야 했던 시절이었다.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북교초등학교) 1923년 모습

#목포 근대교육의 정립

무안항공립소학교가 목포 북교동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교명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을사조약 이후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조선에 대한 직접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1906년 10월 무안감리를 폐지하였다. 동시에 무안항과 무안군을 병합하여 무안부를 설치하였는데, 당시 행정구역 체제로는 무안현 목포진이었기에 무안이라는 교명이 존치되었을 것이다.

1907년 통감부의 신교육령에 의해 4월 1일 공립목포보통학교로 개칭하였다. 당시 노인정 건물을 임시 교사로 하여 4년제 학제로 재개교한 것이다. 그런 연고로 북교초등학교에서는 1907년 입학생들을 기준으로 졸업 기수를 산정한다. 당시 10세를 맞은 개항둥이 극작가 김우진도 입학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08년 무안읍 교육부인회에서 운영하던 여자부를 통합하였고 건물도 1동 기부받았다.

1910년 김우진을 비롯한 1회 졸업생 24명 배출되었다. 1911년 11월 4년제 목포공립보통학교로 재인가되어 남학생 182명, 여학생 74명으로 규모가 크게 늘어났다. 1922년에는 여학교(목포여자보통학교)가 분리 운영되었다가 1927년 화재로 인해 1928년 다시 합병되었다. 또한 1923년 무렵에는 인구 증가에 이어 보통학교 입학 경쟁률이 8:1 정도로 극심하여 부설 학교를 설립, 2개 학급을 운영하였다가 이 역시 1927년 통합하였다.

그 뒤 교명이 1932년 목포제일보통학교, 1938년 목포심상소학교, 1940년 목포북교공립심상고등소학교, 1941년 목포북교공립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일제의 식민 교육 정책에 의한 것이었지만 모두 시대적 의미가 담겨있다. 광복 후 1946년 7월에는 목포북교국민학교로, 1996년 3월부터는 목포북교초등학교라는 교명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매일신보, 조선시보, 부산일보, 경성일보 등에 이 학교 교원 임면 또는 학교 상황과 관련한 단신 등 몇 백 건의 기사들이 보이지만 지면 관계로 상세한 언급은 생략하기로 하겠다. 다만 단편적 정보이지만 교사 이우정(李愚定)의 행적과 미공개 사건 그리고 바로 잡아야 할 사실 등 몇 가지를 추가하고자 한다.

#사범학교를 수석 졸업한 교사 이우정의 열정

교사 이우정은 무안항공립소학교 시절인 1906년 8월에 임용되어 1907년 공립목포보통학교로 전환되는 모든 과정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가 <관보>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05년 7월 12일이다. 관립 한성사범학교 우등생으로 이우정과 이상봉이 선정되었다는 내용이다. 오늘날로 치자면 국립 사범학교였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성적 우등(수석) 실적까지 관보에 게재할 만한 사항인가 싶다. 이어 1906년 7월 같은 학교의 제8회 졸업시험에서 이우정은 우등 즉 수석을 하였고, 급제자는 김상학과 정중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졸업과 동시에 그해 8월 무안항공립소학교 교원으로 임용되었다. 교직생활의 첫 시작이었다. 교명이 바뀌고 이우정이 7급으로 승진하면서 1907년 5월부터 교장을 겸임하기도 하였다. 목포보통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셈이다. 타고난 천재성에다가 학교가 날로 혁신되니 열정이 넘쳤을 것이다. 이후 2년간 진흥학회 설립과 의연금 모금에 참여하였으며, 1907년 11월에는 교사 신축 및 낙성식을 맞아 교육부장관격인 학부대신 이재곤을 초청하기도 하였다.

1908년 3월에는 학급 증설 추진을 위해 학부에 교원 추가 배치 요청을 하였다가 '무식한 교장'(대한매일신보 3.21.)이라는 핀잔을 듣기도 하였다. 학부에서도 그의 행실을 못마땅하게 여길 정도로 열심이었다. 1908년 1월 승진했다가 2월에 군산보통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이어 7월에는 마산보통학교를 거쳐 1909년 5월에는 공립 보통학교 본과 훈도 겸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행적은 드러나지 않는다. 1930년대 충북 괴산군 일대에서 면장으로 활약했던 동명인이 관보에 보이지만 동일인인지 동명이인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운동

1921년 7월 10일경 미국의 29대 대통령 워런 하딩(Warren G. Harding)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각국의 군비 감축 및 극동 지역을 비롯한 태평양 연안의 긴장 완화와 평화 유지를 위하여 태평양 회의(워싱턴회의)를 개최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상하이 임시 정부에서는 독립 운동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촉구하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이 국내에까지 전해지자 호응이 대단했다. 제2의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11월부터 전국 곳곳에서 시위가 계획되고 진행되었다.

11월의 목포도 마찬가지였다. 매일신보 11월 21일 기사는, 18일 불온 문서를 시가지에 살포한 김영성(金榮晟) 외 3인을 체포하여 조사 중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시위 참여를 독려하는 불온 문서를 뿌린 지역이 북교동인지, 김영성 등의 거주지가 북교동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12월 13일 기사에는 목포공립보통학교 학생 8명을 경찰서에서 취조하고 있으며, 그 중 4명의 학생을 등교 정지했다는 소식도 전한다. 이어 16일 기사에는 "불온한 행동을 했다"며 학교장이 김희중(金熙重), 윤재흠(尹在欽), 김괴문, 배상철(裵相哲) 등 위의 4명의 학생에 대해 권고 퇴학 조치를 했다는 것이다.

이에 시민들이 분노하여 부당한 처사라며 불평이 자자했더라는 후문까지 전하고 있다. 12월 26일에는 "만세를 부르지 않는다면 위해를 가한다"는 협박장이 학교장 나붙었다고 한다. 당시 목포의 정명여학교, 목포상업고, 영흥학교, 양동교회 등지에서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이곳 보통학교(초등학교)에서도 참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퇴학 조치를 받은 김희중 등 4인의 이후 행방도 추적, 확인하여야 할 사항이다.
목포여자보통학교의 '불난 여학교' 사건을 다룬 1927년 12월 6일 부산일보 기사

#불난 여학교 사건

1911년 목포공립보통학교로 재인가 되면서 여학생 입학이 가능하였다. 하지만 1920년대가 되면서 취학 학생 수가 급격히 증가하자 여자부 신설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목포부청의 유지들이 자진하여 기부금을 모금(매일신보 1921.3.5.)하였고, 부지 마련을 위해 다시 유지들이 모여 결의한 결과 건축 공사에 착수(매일신보, 1921.9.21.)하게 되었다. 국비 지원보다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조금 더디 진행되었지만 1922년 6월 1일 마침내 목포여자보통학교가 신설되어 보통학교 교육이 남·여로 분리 실시되었다. 1923년 5월에는 비록 일본인이었지만, 후지모토 미요조(藤本 美代藏)가 교장으로 취임함으로써 남자 보통학교의 부속 학교 상태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목포공립보통학교 여자부'라는 교명보다는 '목포여자보통학교'라는 별개의 교육기관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학교가 신설된 지 4년 후인 1926년에 건물이 신축되었지만 이듬해인 1927년 12월 5일 화재로 인해 건물이 전소되고 말았다. 이에 학교 운영이 불가하여 다시 목포공립보통학교로 통폐합 운영되었다. 12월 6일자 부산일보와 경성일보 기사가 있지만 내용은 거의 유사하다. 부산일보 기사를 중심으로 소개하겠다.

제목은 "방화인가 실화인가, 북교여자보통(학교) 전소", "손해 약 4만 원에 달해, 생도는 남자 보통학교에 수용" 이렇다. 내용을 살피자면 "5일 오전 1시 50분 목포 북교동 여자보통학교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소방대가 출동하였지만 학교가 전소되었으며 3시경에 진화되었다. 작년에 신축하여 남자 보통학교에서 분리되었는데 손실액이 4만 원 정도로 추정된다. 발화의 장소가 교실 승강구(입구)라는 라는 점, 전일(前日, 12월 4일)이 일요일이라서 (학생들이)미등교했다는 점, 실화 1시간 전 숙직원이 순찰할 때 하등의 이상이 없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다분히 방화의 가능성에 맞춰 조사하고 있다. 거주하는 생도들은 당분간 남자보통학교에 수용하여 2부제로 교수할 것이라 한다."

#보통학교 입학, 보통이 아니었네

개항 전후 약 600여 명이던 목포의 인구는 1910년 1만 명, 1919년에는 1만 5천 명을 지났다. 1923년에는 2만 2천 명을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취학 인구도 급격히 증가한 것이다.

"목포 입학난", 1923년 3월 매일신보 기사 제목이다. 목포공립보통학교에서 입학청원서를 1,350명이나 가져갔는데 그중 150명만 수용하고 나머지 1,250명 아동은 갈 곳이 망연하다는 것이다. 경쟁률이 무려 8배가 넘다 보니, 방침이 없는 목포부에 불만이 비등하더란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즉, 4월이 되어 목포 인사들 사이에서 보통학교 증설 운동이 시작되었다. 탈락한 학동에게 추가로 학업 기회를 주기 위한 긴급 조치였다. 임시 학부모회를 개최하여 현장에서 655원의 기부금을 조성하였다. 결의문까지 작성하기를, 목포 제2공립보통학교 설립 논의 시작, 입학생에게는 10원 이상, 재학생에게는 5원의 기부금 징수 그리고 목포교육협회를 조직하여 대응하자는 것이다.

그 결과 5월 17일에 기존 보통학교의 유치원을 폐지하고 목포공립보통학교 부설 학교이자 제2공립보통학교를 남교동 유치원 자리에 설립하였다. 5월 13일을 기준으로 1년 이상 목포 거주자에 한하여 150명 수용하였다. 1923년 5월 16일자 동아일보 4면 단신 기사를 인용한다. "목포제2공립보통학교 교사는 당부(목포부) 남교동 원유치학교 부속이던 건물 1동을 수리 중이던 바 금번 준공되어 지난 13일부터 생도 약 150명을 모집하는 중인데 머지않아 개교될 터이더라"
북교동 김우진 거리

# 최초, 목포 비엔날레

목포공립보통학교에서 1931년부터 비엔날레(격년제 미술 전람회)를 개최하고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등장한다. 1935년 1월 16일자 조선시보의 기사 제목은 "개성교육 시설"이다. 개성교육이란 무엇일까,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목포공립보통학교가 '개성교육 1등 시설'이라는 것인데, 격년으로 모든 학생들이 참여하는 창작품 전람회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는 3월 개최되는 '제3회 창작품 전람회'를 맞아 1월부터 준비에 열중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단위 학교에서 개최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엔날레 행사가 아니었을까. 학생들의 감성교육은 물론 근대적 예술성을 깨우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해방 이전 근대 시기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대부분 이러한 예술 창작, 전시, 공연에 참여하였을 것 아닌가. 북교동 출신 중 유난히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정점에 계신 분들이 많다고 생각했더니 이러한 전인적 성장 프로그램과 교육 환경 때문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누가 처음 전람회를 기획하였는지, 언제까지 유지되었는지도 관심거리이다. 학교 주변 이야기가 길어져 <하-2편>에 이어 가겠다.

선명완 담쟁이대안교육연구소장
선명완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