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체제 종식?…세계 무역 질서 움직임 심상찮다
지역·복수국간 협정 확산 전망
EU “CPTPP로 대체” 주장
국내에선 시장개방 두고 우려
영향력 줄었지만 여전히 근간
미·중 협상으로 향방 갈릴 것


정부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검토를 공식화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전쟁으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흔들리는 가운데, 새로운 무역 질서를 둘러싼 움직임이 유럽 등에서도 확산하고 있다. 국제 질서의 변화는 국내 농업계에도 보조금 규제와 시장 개방을 둘러싼 불확실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 영향력 줄어드는 WTO 체제, 향방은=트럼프 대통령이 올 4월 ‘해방의 날’을 선언하며 관세전쟁을 본격화한 이후 WTO 체제는 약화를 넘어 ‘종식’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응고지 오콘조-이웰라 WTO 사무총장은 2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올초 80%에 달했던 WTO 최혜국 대우(MFN) 무역 비중이 72%로 떨어졌으며, 추가 하락 가능성도 있다”며 “80년 만의 가장 큰 혼란”이라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다자주의가 흔들리며 지역주의·복수국간(plurilateral) 협정이 확산할 것으로 본다. 마이클 프로먼 전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즈(FT) 인터뷰에서 “미국과 중국이 WTO 메커니즘을 무시하는 가운데, 규칙 기반 글로벌 시스템의 미래는 단일 다자 협상이 아닌, 유사한 국가간 지역 또는 복수국간 협정이라는 구조로 파편화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유럽연합(EU)은 CPTPP와 같은 새로운 무역 그룹이 무너진 WTO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올 6월 CPTPP를 “WTO 재설계의 시작으로 생각할 수 있다”며 가입 의지를 내비쳤다.
◆ “종식은 섣불러”…WTO, 여전히 국제무역 근간=WTO 체제가 약화하면서 ‘종식’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하자 국내 농업계에도 혼란이 번지고 있다. 대표적인 쟁점은 WTO 농업협정에 따른 보조금 상한이다. 현재 한국의 농업보조금은 WTO 농업보조총액(AMS) 규제를 기준으로 운용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WTO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국제 무역의 근본 규칙으로 기능할 것이라고 본다. 정대희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WTO 체제가 새로운 동력을 찾지 못하고 약화하면서 양자 자유무역협정(FTA)이 확산했고, 그 맥락에서 CPTPP 같은 협정도 등장한 것”이라며 “미국이 WTO 체제를 무시한 것은 맞지만, 여전히 많은 국가들이 WTO 규범 속에서 무역하고 있어 종식이라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에 WTO 규제한도를 넘어 농업보조금을 운용하자는 주장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 부연구위원은 “한국은 미국처럼 독점적 힘을 가진 나라가 아니다”라며 “대외 의존도가 높은 만큼 국제시장에서 신뢰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데, 불확실한 행동으로 신뢰를 잃기보다는 국제 규범을 따르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고 말했다.
◆ CPTPP 가입 검토…넘을 벽 많아=정부가 CPTPP 가입 검토를 공식화하면서 농업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가입까지는 넘어야 할 벽이 많다. 정 부연구위원은 “EU가 현재 CPTPP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회원국들 입장에서도 우리보다 규모가 큰 EU가 더 매력적인 시장이기 때문에 협상이 늦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과거 CPTPP 가입 추진 국면에서도 일본이 한국에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을 요구하며 가입을 반대한 선례가 있는데, 국제 관계가 다소 개선됐다지만 이 문제도 여전히 뇌관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향후 WTO 체제의 향방은 미·중 관세협상이 가를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김기환 NH농협금융지주 NH금융연구소 부연구위원은 “미국이 관세협상에 나선 가장 큰 원인은 결국 중국과의 무역적자 해소”라면서 “향후 중국과의 협상이 트럼프 관세 정책을 좌우할 국면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은 최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중국과의 협상을 난제로 지목하며 상호관세를 “녹아내리는 각얼음”이라고 표현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마지막 임기 중이고, 미국이 스스로 촉발한 WTO 체제를 완전히 무시하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백악관은 대외 원조 삭감 목록에 당초 WTO를 포함했지만, 8월29일 내놓은 49억달러(6조8159억원) 규모의 삭감안에서는 의회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WTO를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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