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하와이 그리고 인하

기호일보 2025. 9. 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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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 인하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전 미래학회 회장
이재우 인하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인천의 옛 이름은 여러 가지다. 백제 건국에 나오는 미추홀은 가장 오래된 이름이다.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하고 매소홀로 불렸다가 통일신라시대에 소성현이 됐다. 고려시대에 인주로 불렸고 후에 경원부로 승격됐다. 조선 태종 때 인천이라 불렸다. 구한말에 개항이 이뤄지면서 제물포와 동인천이 인천의 중심이 됐다. 1876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강화도조약을 강요하면서 제물포가 개항됐다. 이후 인천은 청국조계지, 일본조계지, 공동조계지(미, 영, 독, 청, 일) 등이 설치돼 외국인 거주가 늘어나며 국제도시의 모습으로 발전했다. 구한말 이래 인천은 각종 문물, 문화, 인력의 교류가 일어나는 창구였다.

서기 600년께 폴리네시아인들이 하와이에 사탕수수를 도입했다. 서구인들은 하와이가 사탕수수 재배의 최적지임을 알아보았다. 1840년 이후에 하와이에서 사탕수수 재배가 본격화했고 대규모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세워졌다.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농장주들은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필리핀인 이민자를 받아들였다.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은 1902년 대한제국 미국 공사 앨런이 하와이 사탕수수농장협의회의 요청을 고종황제에게 전달하고 허가를 받으면서 시작됐다. 이를 계기로 미국인 데쉴러가 인천에 동서개발회사를 세워 이민자를 모집했으나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인천 내리교회 존스 목사에게 도움을 청했고 신도와 인천 거주민을 대상으로 이민자를 모집했다. 먹여주고 재워주며 많은 급여를 준다는 소문에 121명이 지원했다. 1902년 12월 22일 이민자들은 마지막 모습으로 제물포항을 눈에 담고 출항했다. 1903년 1월 2일 고베항에서 신체검사를 거친 102명이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에 하와이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인 하와이 이민 시대가 열렸다. 이들은 고종황제의 직인이 찍힌 집조(비자)를 지참하고 있었다. 하와이 이민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해 대한제국 외교권이 박탈당하면서 고종황제가 더 이상 비자를 발급할 수 없게 돼 중단됐으며 짧은 기간에 하와이에 이주한 한국인은 7천921명에 달했다.

힘든 사탕수수 농장 노동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이민자들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켜나갔다. 10명 이상 모이면 자치조직인 동회를 만들었고 1903년 8월에는 정치조직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수호운동을 전개했다. 1907년에는 하와이 한인합성협회로 한인단체가 통합됐고 1912년 11월에는 미국의 독립단체들이 대한인국민회로 통합됐다.

하와이 한인들은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되자 끊임없는 국권회복운동을 펼쳤다.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 재판 경비를 모금해 전달했다. 1912년에는 박용만 장군이 하와이로 건너와 국민 기관지 주필이 됐다. 그는 후에 미국 본토에서 군관생 200명을 모집해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1913년 이승만은 하와이로 건너와 교육 및 종교사업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지원했다.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하와이 독립단체는 임시정부의 중요한 재정적 기반이 됐다. 하와이 이민자들 사탕수수농장에서 식비, 피복비, 주거비를 제하고 남은 노임에서 한 푼 두 푼 모아 독립자금을 마련했다. 백범 김구 주석이 "임시정부 재정의 절반은 하와이가 담당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고 정부가 수립되자 하와이 독립운동 단체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대한민국의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동양의 MIT' 같은 대학을 설립해 달라고 건의하며 기금을 모아 송금했다. 하와이 독립운동의 뜻을 기려 1954년 인천 미추홀구에 인하공과대학이 설립됐고 이것이 오늘날의 인하대학교가 됐다. 인하대학교는 하와이 이민자들의 독립운동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진정한 '민족대학'이다. 인천의 '인'과 하와이의 '하'가 결합해 '인하'라는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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