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되는 화폐 이야기] 15. 예술품 저장 공간 ‘위기의 수장고’, 지하벙커서 해법 모색
문화유산 보존, 임시방편 아닌 지속가능 전략 절실
![현대적 시설을 갖춘 국립현대미술관의 ‘청주관 수장고’ 내부시설. [조폐공사 제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9/07/dt/20250907104448380vvmc.jpg)
올해 2월 초, 국립한글박물관에서 발생한 화재는 우리 사회에 깊은 경각심을 남겼다. 다행히 큰 피해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이면에는 국내 문화재 보존 시스템의 구조적 취약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화려한 전시실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수장고는 지금 포화상태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 문제는 단순한 저장 공간 부족을 넘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훼손될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을 의미한다.
전국 대부분의 박물관과 미술관은 이미 수장고 점유율이 한계치를 넘어섰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경우, 점유율이 90%에 달해 더 이상 새로운 작품을 수용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기존 수장고를 확장하거나 새로운 시설을 짓는 방식은 막대한 예산과 오랜 시간이 소요돼 단기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더욱이, 부지 선정의 어려움과 건축 과정에서의 환경 문제 등 여러 난관이 뒤따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문화예술계와 지자체는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해법을 모색하고 있으며, 그 해답의 한 가지로 한국조폐공사 화폐본부의 지하 벙커가 주목받고 있다.
조폐공사 화폐본부의 지하 벙커는 본래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해 화폐를 안전하게 제조하고 보관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된 시설이다. 그러나 화폐수요 감소로 인한 사회적 변화의 영향으로 현재 이 시설의 활용도는 매우 낮은 상황이다. 이 공간은 그 태생부터 최고 수준의 보안과 방호를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미술품과 문화재를 보관하는 데 필요한 최적의 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다. 강력한 보안 체계, 자연재해에도 끄떡없는 견고한 구조, 그리고 작품 보존에 필수적인 일정한 온습도 유지 기능까지, 고도의 인프라가 이미 구축돼 있어 추가적인 건축 없이도 빠르게 수장고로 전환될 수 있다. 이는 신규 수장고 건립에 드는 비용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는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대안이다. 조폐공사 지하 벙커를 수장고로 활용하는 방안은 여러 측면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새로운 수장고가 들어설 한국조폐공사의 화폐본부 외관. [조폐공사 제공]](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9/07/dt/20250907104449748slqs.jpg)
첫째, 탁월한 안전성이다. 지하 벙커는 화재, 침수, 지진 등 외부 위험으로부터 완벽에 가깝게 격리되어 있다. 본래 국가의 중요한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만큼, 어떠한 위협에도 예술품과 문화재의 물리적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이는 2월 초 발생한 국립한글박물관 화재 사건이 우리에게 일깨워준 경각심에 대한 가장 확실한 해답이 될 것이다.
둘째, 예술품 보존에 최적화된 환경이다. 문화재와 예술품은 온도와 습도의 미세한 변화에도 쉽게 손상될 수 있는 민감한 대상이다. 지하 공간은 지상에 비해 자연적으로 온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어 안정적인 보관 환경을 조성한다. 이는 값비싼 항온항습 설비를 최소화하면서도 장기적인 작품 보존에 기여할 수 있는 큰 장점이다.
셋째, 경제성과 효율성이다. 새로운 수장고 건립에는 수백억 원의 예산과 최소 수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반면, 기존 시설을 리모델링하는 방식은 훨씬 경제적이며 신속하게 추진할 수 있다. 이미 구조적 안정성과 공간성, 접근성 등의 요건을 충족하고 있는 조폐공사 지하 벙커는 빠른 시일 내에 실현가능한 현실적인 대안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이미 해외에서도 유효성이 입증되고 있다. 스위스 제네바의 ‘프리포트(Freeport)’는 항공 물류기지를 세계적인 미술품 수장고로 탈바꿈시켜 수많은 박물관과 갤러리의 작품을 위탁 보관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해외 선진국에서는 폐쇄된 지하 방공호나 데이터 센터를 복합 문화 시설이나 아트 스토리지로 개발하는 프로젝트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이처럼 보안과 내구성을 갖춘 기존 시설을 문화 보존 인프라로 재활용하는 방식은 이제 전 세계적인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국립한글박물관의 화재는 단순한 사고를 넘어, 우리 문화유산 관리 체계를 전면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 사건이다. 전시 공간에 가려져 있던 수장고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우리 문화유산을 온전히 지키기 어렵다. 문화재와 예술품은 단순히 오래된 물건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정체성과 정신을 담고 있는 살아있는 사회적 자산이다. 이를 체계적으로 보존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자 미래 세대에 물려줘야 할 의무이다.
조폐공사의 지하 벙커 활용은 단기적인 공간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임시방편이 아니다. 이는 기존 인프라를 창의적으로 활용하여 문화재 보존의 효율을 극대화하고, 지속 가능한 문화 정책을 펼쳐나갈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쌓여가는 예술품과 유물들이 ‘어디에, 어떻게 보관되어야 할지’에 대한 질문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조폐공사 지하 벙커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가장 혁신적이고 실용적인 답이 될 것이다.
이제는 정부와 공공기관, 문화예술계가 함께 힘을 모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자산을 지켜낼 지속 가능하고 체계적인 보존 전략을 세워야 할 때다.

강승구 기자 ka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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