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칼럼)진화하는 ‘사법의 정치화’

우리 헌법 제45조는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과 표결에 관하여 국회 외에서 책임을 지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면책특권까지 준 발언권 보장이 포함된 조항이다.
그런데 의원들은 이 발언권을 자주 사유화한다. 헌법에 적힌 내용과 달리 직무와 관련 없는 발언도 면책특권이 있다고 착각하는데, 그걸 용납하는 분위기가 정착됐다. 본회의나 상임위, 예결위에서 소관 부처 장관을 상대로 자기 지역구의 민원 해결을 요구하는 건 기본이다. 심지어 개인 신상과 관련한 선처를 호소하기도 한다. 지난 4일 법사위에서 민주당 박지원 의원이 정성호 법무부 장관에게 들이민 건 압권이었다.
박 의원은 본인이 국정원장 시절 있었던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의 피고인으로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국정원 서버에서 특수정보 문건 등 관련 자료 삭제를 지시했다는 혐의다.
그런데 법사위에서 그는 삭제됐다는 문건 등이 메인 서버에 그대로 남아있음이 정권 교체 후 국정원 감사에서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또 서해 사건은 윤석열 전 대통령, 감사원, 국정원, 검찰이 공모해서 정치공작으로 고발한 사건이라고 했다. 검찰의 기소가 잘 못 됐으므로 지금이라도 취소하라는 요구다.
검찰의 공소 취소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한 사건이나 강력 사건에서 진범이 따로 잡혔을 경우 등 매우 한정적으로 이뤄진다. 박 의원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재판이 진행 중인 법정에서 다퉈야지 재판 자체를 없애달라고 하는 건 과하다.
정 장관도 그런 증거들을 법원에 제출해서 신속하게 재판을 종결하는 게 더 빠를 것 같다며 에둘러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럼에도 박 의원이 자신은 정치 수사의 희생자라며 공소 취소를 압박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정 장관과 민주당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 이재명 정부 출범 후 정치와 연결된 사건을 공소 취소할 수 있다고 처음 '아이디어'를 꺼낸 인물이 바로 정 장관이다. 그는 장관 지명 사흘 전 한 강연에서 이재명 신임 대통령의 재판들은 어떻게 돼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의 답변은 유권자들이 이재명 후보가 재판 중임을 알고도 뽑았으므로 공소를 취소하는 게 맞는다는 거였다. 재판 연기도 아니고 아예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동기이고 친명 7인회 좌장이 '공소 취소'를 언급하자 진보 진영에선 쾌재를 불렀다. 대통령에 당선되면 진행 중인 재판도 중단되는지 헌법 84조(불소추특권) 해석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던 차에 새로운 해결책이 제시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물론 법조계에서도 당선됐다고 공소를 취소하는 건 법질서를 허무는 발상이란 비판이 쏟아졌다. 정 장관도 인사청문회에선 특정 사건에 대해 법무부 장관이 검사에게 공소 취소를 하라고 지휘하는 건 맞지 않는 것 같다며 한발 물러섰다.
그렇지만 박 의원이 발언권을 사유화해 공개 요구한 데서 보듯 범법 혐의를 재판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털려는 수단으로 공소 취소가 인식돼 버렸다.
이번 법사위 장면은 사법 위기를 정치 영역으로 끌어들여 해결하려는 시도가 만성화한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대북송금 혐의로 재판 중인 이화영씨에겐 옥중 피고인을 국회 청문회에 출석시켜 셀프 정치 변론하는 장을 제공했다. 최근엔 대법원에서 징역형이 확정된 다른 사건에 대해 '재심'을 목표로 여당 국회의원들이 움직이고 있다.
1, 2심에서 징역형을 받고 확정판결을 기다리던 중 보석으로 석방된 김용씨에 대해선 무죄 취지 파기 환송하라며 여당이 대법원을 압박 중이다.
이화영·김용 두 사람은 이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다. 최근에 사법 문제를 정치 영역으로 확실히 끌어들인 인물도 이 대통령이다. 앞으로 사법의 정치화가 어떤 형태로 진화할지 두렵기조차 하다.
송국건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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