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명목을 찾아서] (22) 대산 이상정 선생 종택의 향나무, 문덕(文德)의 향기 오래 간직해

2025년 봄은 유례없는 산불로 의성, 안동, 영덕 일대에 큰 피해를 주었다. 다소의 인명 피해도 있었지만, 당국의 신속한 대처와 주민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헌신적인 자원봉사자들의 지원으로 상처가 서서히 아물고 있는 것 같다.

중부내륙 고속도로를 타고 의성군 지역에 들어서니 주변 산들이 붉거나 혹은 검은 숲으로 변해 마음이 착잡했다.
1988년 지방 공무원의 꽃이라는 사무관에 임용되어 받은 첫 보직이 산림계장이었다. 이듬해 대구시 동구 초례산 일대에서 큰불이 나 2박 3일 동안 숙식을 사무실에서 하며 진화 인력과 헬기 등 장비 지원으로 힘들었던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산문(山門)을 나와 3대 정승, 3대 대제학을 연이어 배출하여 대구서씨를 국반(國班)의 반열에 올린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이 태어난 소호헌(蘇湖軒, 보물)을 보고, 가깝게 있는 한산이씨 대산종가(경북 문화 유산자료)를 찾았다. 종택은 조선 후기 대학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이 태어난 곳이다.
불쑥 찾아온 일행을 이방수(李芳洙) 종손이 반갑게 맞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밖에서 설명을 듣겠다는 작업복 차림의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대산(大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화제는 산불로 바뀌었다, 종가를 지키기 위해 소방차를 지원받아 밤새 물을 뿌렸던 무용담보다 불천위(不遷位) 위패를 화마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화급히 대구 본가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더 가슴 깊이 다가왔다.
명문가(名門家) 후손이라는 책임감이 보통 사람들과 확연히 다르구나! 하는 생각에 저절로 머리가 숙어졌다. 그 사이 부인께서 차를 내왔다, 이일 역시 손님을 맞이하는 태도가 여느 사가(私家)와 달라 감격했다.
대산은 본관이 한산(韓山)으로 아버지는 이태화(李泰和), 어머니는 재령이씨 밀암(密庵) 이재(李栽)의 딸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11세손 고조부 이홍조(李弘祚, 1595~1660)가 광해군 때 외조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있는 안동으로 피신해 오면서 그 후손들이 안동에 세거하게 되었다.
1735년(영조 11)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739년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9월 다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산서당을 짓고 제자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1753년(영조 29) 연일 현감이 되어 민폐를 제거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데 진력하였다. 2년 2개월 만에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그대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직첩(職牒, 임명장)을 박탈당했다. 그 이후 오직 학문에만 힘을 쏟아 사우들과 강론하고, 제자를 교육하는 데 전념하였다. 정조가 병조 참지·예조참의 등에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황(李滉, 1501~1570) 이후 기호학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된 영남학파 계승을 주창한 갈암 이현일(李玄逸, 1627~1704)·밀암 이재(李栽, 1657~1730)로 이어진 영남학파의 중추적 인물이다. 대산 이상정은 지향하는 바가 퇴계를 닮아 '소퇴계'( 小退溪)로 불린다.

저서 및 편저로는 『사례상변통고』(四禮常變通攷)·『약중편』(約中編)·『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등이 있다. 고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고산서원(高山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사당 앞에 향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아마 대산 사후 사당을 완성하고 후학들이 심은 것 같다. 유학자를 기리는 재사(齋祠)에는 대체로 행단(杏壇)에 빗대 은행나무를 심거나 공자가 수식한 회(檜)나무에 빗대 전나무를 심어 본뜻과 달리 이해한 경우가 많은데 자전(字典)에서 말하는 노송나무 즉 향나무를 정확히 이해하고 심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 의미를 고스란히 살린 우리나라 몇 집 되지 않은 반가(班家)의 모범적인 식수(植樹) 문화를 보니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이정웅 (사)대구생명의숲 이사장, 전 대구시 녹지과장
Copyright © 대구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