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멸의 칼날 VS 케데헌, 대박 애니메이션의 비밀

유주현 2025. 9. 6.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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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애니메이션 시장은 동아시아 영웅서사가 평정했다. 넷플릭스 역대 흥행 1위에 등극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이어 ‘귀멸의 칼날(Demon Slayer): 무한성편’도 아시아 시장을 정복했고, 곧 개봉을 앞둔 북미 시장도 오프닝 스코어를 2900만 달러까지 전망하는 등 들썩이고 있다. 이미 전 세계에서 3억 달러 이상을 벌어 들였고, 한국에서도 개봉 열흘 만에 관객 300만을 넘겨 올해 극장가 최단 기록을 갱신 중이다.

콘텐트 강국이 됐지만 유독 장편 애니 부문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한국은 지금 ‘케데헌’이 국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애통해 하며 ‘제2의 케데헌 만들기’를 화두로 두고 있다. 애니 왕국 일본에서도 모든 기록을 갈아 치우며 작품성과 완성도 면에서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귀칼’이 궁금한 이유다.

주간 소년 점프에 2016~ 2020년 연재된 고토게 고요하루의 만화가 원작이다. 누계 발행 2억2000만부. 일본 역사상 가장 흥행한 소년만화다. 2019년 애니화되면서 시너지가 폭발했는데, 2020년 극장판 ‘무한열차편’은 일본 영화 역대 흥행 1위이자 사상 최초로 글로벌 박스 오피스 1위에 오른 비영어권 영화로 기록됐다. ‘무한성편’은 시리즈 최종 3부작의 첫 장으로, 원작이 완결됐기에 팬덤의 열기가 더 뜨겁다. 혈귀의 본거지 무한성에서 펼쳐지는 진검승부가 만화를 찢고 나와 엄청난 스케일의 공간감과 박진감 넘치는 카메라워크, 압도적인 사운드트랙으로 구현되어 극도의 몰입감과 현장감을 선사한다.

‘귀멸의 칼날’ 아카자는 전생의 기억을 회복하자 스스로 소멸을 택한다. [사진 각 제작사]
가족을 배신한 죄책감을 루미를 위한 희생으로 씻은 ‘케데헌’ 진우. [사진 각 제작사]
흥미롭게도 핵심 모티프가 ‘케데헌’과 같다. ‘데몬’ 사냥에 나선 영웅서사다. ‘케데헌’의 ‘귀마’는 사자보이즈를 앞세워 헌트릭스의 팬덤을 빼앗고 헤게모니를 쥐려 하고, ‘귀칼’의 ‘키부츠지 무잔’은 혈귀 부대인 ‘십이귀월’을 길러 귀살대와 대결하며 불멸을 꿈꾼다. 선악 이분법이 흐릿한 것도 유사하다. 반쯤 데몬의 피를 이어받은 ‘케데헌’ 루미처럼 ‘귀칼’의 네즈코도 반쯤 혈귀로 변했지만 뭔가를 극복한 존재다. 악귀들도 사연이 있다. 가족을 배신한 죄책감을 루미를 위한 희생으로 씻어낸 진우처럼, ‘귀칼’ 혈귀들도 저마다 억울한 과거를 드러내니 마냥 미워할 순 없다.

방향성은 다르다. ‘케데헌’은 아이돌과 팬덤이라는 K팝 문화를 새로운 문법으로 번역한 현대적 신화다. K팝의 울림을 세계로 확장시키는 미래지향적 세계관 속에 무당굿·당산나무·까치호랑이·저승사자 같은 전통적 모티프가 이국적인 매력 요소로 작용할 뿐, 실제 우리 신화나 전설 같은 정신적 영역을 파고든 건 아니다. 하지만 K팝 OST의 돌파력으로 ‘넷플릭스 역대 누적 조회수 1위’에 등극하고 빌보드 차트까지 정복했으니 그 자체로 21세기 성공 신화가 됐다.

반면 고대 일본 신화를 모방한 ‘귀칼’의 세계관은 내셔널 아이덴티티로 중무장하고 있다. 한때 우익 논란이 있었던 욱일기 귀걸이를 부적처럼 달고 다니며 일륜도(日輪刀)와 호흡술로 혈귀를 무찌르는 주인공 탄지로를 『일본서기』 속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비호를 받는 영웅 야마토타케루로 해석한 연구도 있다. 탄지로의 가문에 전수되는 ‘히노카미 카구라(日の神 神楽)’ 검법은 신도에서 추는 카구라 춤에서 영감 받은 신성한 의식이다. 팬덤이 열광하는 전투 장면이 단순 액션을 넘어 일본의 영적인 전통과 맞닿아있는 것이다.

혈귀들의 힘에 대한 집착, 불멸에 대한 갈망과 ‘강자는 약자를 지켜야 한다’는 무사도의 대립도 정신적인 영역이다. ‘무한성편’의 잦은 플래시백을 옥의 티로 보기도 하지만, 악의 축인 무잔이 1000년을 살고 있다는 설정 하에 역사를 종횡무진 누비는 것은 근원적 뿌리를 추구하는 원작의 플롯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 내가 홀로 붕 떠있는 게 아니라 조상들이 쌓아온 수행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윤회 사상에 가깝다.

해묵은 신화와 내셔널리즘적 철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건 반전 메시지로 이어지는 감동적인 서사다. 무한성편은 ‘아카자의 재래’라는 부제를 달고 혈귀 아카자를 주인공 삼아 그 전생을 30분간 보여준다. 약자를 혐오하며 오직 강해지려는 목표만 남은 혈귀가 전생의 슬픈 기억을 회복하자 스스로 소멸을 택한다. 선악 구별을 넘어서는 인간적 슬픔이 가득한 회상 장면이 흐를 때 레퀴엠 같은 장엄한 음악의 울림이 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든다. 신파 코드 이면에 악한에 대한 면죄부를 준다는 해석도 있지만, 입체적인 캐릭터와 세계관이 인간성 회복과 구원에 관한 깊은 울림으로 와닿는 건 어쩔 수 없다.

제작사 소니 픽처스와 유포테이블이 만들어낸 동아시아 영웅서사는 닮은 듯 다르다. ‘케데헌’은 근현대 걸그룹의 계보에서 K팝이라는 신무기를 장착한 수퍼히어로 시스터즈가 나타나 풀뿌리 팬덤의 지지를 업고 기득권 세력의 횡포에 맞선다는 21세기 디즈니식 동화다. ‘귀칼’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일본의 역사를 수직으로 관통하는 영웅 신화지만, 강자는 약자를 도와야 하며 불멸의 육체가 아닌 영원히 계승되는 정신을 추구해야 한다는 현대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둘 다 비현실적이지만 새로운 담론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수퍼 IP의 위엄을 갖췄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영웅을 원하고 있나. ‘제2의 케데헌’을 우리 손으로 만들려면 그 방향성부터 고민해야겠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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