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철의 중국萬窓] 측천무후가 ‘무자비’(無字碑)를 세운 이유

강현철 2025. 9. 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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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부터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라고 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다. 권력자든 명망가든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건 인생의 꿈이다. 그래서 중국 황제들은 죽고 난 후 묘지앞에 거대한 비(묘비)를 세우고, 공적을 비에 새겨넣었다. 보통 앞면에는 그 사람의 이름이나 직위를 새기고, 뒷면에는 공덕을 새긴다. 당의 고조는 죽은 후 높이 6.4m, 폭 1.86m의 묘비가 세워졌다.

하지만 몇몇 황제들은 비에 아무런 글씨도 새기지 않은 ‘무자비’(無字碑)를 남겼다. ‘백비’(白碑) 또는 ‘몰자비’(沒字碑)라고도 한다.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여황제인 무측천(武則天)이 대표적이다. 측천무후(則天武后)로도 불리는 무측천은 당 나라 제3대 황제 고종의 황후다.

그는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돼 15년 동안이나 중국을 통치했다. 정치를 쇄신하고 파격적으로 인재를 등용해 행정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등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지만 황제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한 공포정치로 악명이 높았다. 자신의 야욕을 위해 딸과 아들까지 죽이는 등 광기의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섬서성(陝西省) 건현(乾縣)의 양산(梁山)에 있는 건릉(乾陵)은 당 고종과 무측천의 합장 릉이다. 무측천이 직접 설계와 건설을 진두 지휘했다. 서안(西安) 서북쪽 약 80km 지점에 위치한다. 건릉에 이르는 길가에는 120여개 석상이 늘어서 있는데 길의 가장 안쪽 서쪽과 동쪽에 두개의 석비가 세워져 있다. 하나는 고종의 ‘술성비’(述聖碑)이고, 다른 하나는 무측천이 자신을 위해 세운 ‘무지비’다.

무측천의 무자비는 반듯하고 커다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높이 7.53m, 너비 2.1m, 두께 1.49m에 무게는 무려 98.84t에 달한다. 비의 정상에는 여덟마리의 용이 뒤엉켜 있는 모습이 조각돼 있고, 비의 동서 양측에는 날아오를 듯한 승룡도(乘龍圖) 한폭이 새겨져 있다. 비의 받침은 길이 3.35m, 너비 2.65m, 높이 1.10m다. 비의 겉면에는 눈을 부릅뜬 사자와 발을 구부린채 고개를 숙인 말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유독 비문만이 없다.

측천무후은 임종 직전 유언에서 자신의 공과 과를 후대가 평가하게 하라고 일렀고, 그래서 사후 무자비가 세워졌다. 무측천이 이렇게 무자비를 남긴 것은 그에 대한 논란이 많아 공적비를 세우면 훼손될 수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무측천의 공덕이 너무 많아 기록할 수 없음을 자랑하기 위해서라는 해석도 있다. 남편인 고종과 합장될 예정이어서 그녀를 황후라고 할 것인가 황제라고 할 것인가 난감해서라는 분석도 존재한다. 그래서 그의 아들 중종 이현이 아예 한자의 기록도 남기지 않고 모든 평가를 후대에 맡겼다는 것이다.

중국 5대 명산인 오악가운데 최고로 꼽히는 태산의 정상에도 높이 6m, 폭 1.2m의 무자비가 세워져있는데 주인공은 한 무제다. 한 무제가 원봉 2년(기원전 109년) 태산에 처음 올랐을때 세운 비로 전해진다. 황제로 30년간 있으면서 세운 공이 너무 많아 비에 새길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들 두 황제외에 부득이하게 무자비가 세워진 황릉도 있다. 바로 북경에서 북쪽으로 약 60km 정도 떨어진 장평현에 있는 명 13릉의 여러 비석이다. 명 태조 주원장은 황제의 비석에는 신하가 글을 올릴 수 없으며, 오직 후임 황제만이 비문을 지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명 태조의 비문은 후대 성조 주체가 썼으며, 주체의 비문은 인종 주고치가 썼다.

하지만 가정 황제 주후총은 본래 비석이 없었던 헌릉, 유릉, 무릉, 태릉, 강릉에 재위 기간 중 비석이 세워졌지만 주색에 빠져 비문을 짓지 못했다. 가정 이후 황제들은 선대 황제가 비문을 짓지 않았으니, 자신들도 감히 비문을 짓지 못하겠다고 해 그 후 황제들의 비석은 모두 무자비로 남게 됐다. 이가운데 명 나라의 13대 황제인 신종 만력제(萬曆帝)의 신공성덕비(神功聖德碑)가 유명하다. 높이가 5m나 되는데 글자가 단 한 자도 새겨져 있지가 않다.

강현철 기자 hcka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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