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 리포트] 이병헌 밟은 레드카펫은 35m 남짓… 베니스영화제의 힘은 어디서

영화제하면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레드카펫입니다. 한껏 차려 입은 영화인들이 붉은색 천을 밟는 순간은 영화제 하이라이트 중 하나입니다. ‘레드카펫을 밟는다’는 말이 영화제 참가를 에둘러 표현할 정도로 레드카펫과 영화제는 밀접한 관계입니다.
올해 제82회를 맞은 베니스(베네치아)국제영화제도 레드카펫이 있습니다. 지난달 30일 밤(현지시간) 한국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박찬욱 감독과 배우 이병헌, 손예진, 이성민, 염혜란, 박희순이 베니스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아 한국 영화팬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죠. 유수의 영화제이다 보니 레드카펫이 꽤 길 거라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정작 베니스영화제 현장에 와서 보면 조금은 당혹스럽습니다. 예상보다 레드카펫 길이가 짧기 때문입니다.
짧은데다 기역자 모양으로 꺾인 레드카펫

베니스영화제의 꽃은 경쟁 부문입니다. 경쟁 부문 초청작들은 영화제 중심 건물인 팔라조 델 시네마의 살라 그란데(대극장)에서 공식 상영회를 합니다. 상영회를 앞두고 해당 영화의 감독과 배우들이 레드카펫을 밟습니다. 건물 바로 왼쪽에서 차를 내려 15m가량 걸은 후 왼쪽으로 돌아 건물로 들어갑니다. 건물 현관에서 살라 그란데 입구까지는 20m 남짓한 레드카펫이 깔려 있습니다. 감독과 배우들이 걷는 레드카펫 길이는 35m 정도에 불과하고 실외에서 실내로 기역자 모양으로 꺾인 형태입니다. 빠른 걸음으로 20초 정도 걸릴 거리에서 감독과 배우들은 사진 촬영에 응하고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며 자신의 인기를 만끽합니다. 팔라조 델 시네마는 1937년 완공된 영화제 전용 건물입니다.

영화제 레드카펫하면 꽤 길이가 길다고 여기기 마련입니다. 레드카펫에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가 빚어낸 환상으로 여겨집니다. 한국 영화제들과 영화 시상식 레드카펫이 제법 길다 보니 만들어진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한 영화인들은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야외극장 레드카펫을 80m 정도 걷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도 레드카펫 길이가 베니스영화제보다 길면 길었지 짧은 경우는 없었던 듯합니다.
칸영화제 레드카펫은 40m 남짓

베니스영화제만 레드카펫이 짧을까요. 영화제 중의 영화제로 꼽히는 칸국제영화제 역시 생각보다 레드카펫 길이가 짧습니다. 칸영화제 경쟁 부문 공식 상영회는 영화제 중심 건물인 팔레 드 페스티발의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열리고는 하는데요. 감독과 배우가 차를 내려서 뤼미에르대극장 입구까지 걷는 거리는 대략 40m입니다. 도중에 꽤 긴 계단이 있어 좀 오래 걷는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칸영화제, 베니스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어떨까요. 베를리날레 거리에서 영화제 중심 건물인 베를리날레 팔라스트 입구까지 60m 정도 길이의 레드카펫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는 200m 가량의 레드카펫이 깔립니다. 아카데미상 시상식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리는데요. 돌비극장은 오베이션 할리우드 쇼핑몰 앤 엔테테인먼트 컴플렉스라는 복합건물 안에 있습니다. 영화인들은 차에서 내려 복합건물로 들어선 후 양쪽에 점포들이 있는 긴 복도 위에 깔린 레드카펫을 걸어 돌비극장에 입장합니다. 빠른 성인 걸음으로 2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환한 웃음을 짓고 손을 흔들며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걷기에는 좀 긴 거리로 여겨집니다.
영화제 전통을 만드는 건 좋은 영화

레드카펫이 길다고 세계적 영화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레드카펫이 짧다고 이류 영화제로 분류되는 것도 아니겠지요. 레드카펫 길이와 영화제의 명성은 별 상관이 없습니다.
레드카펫은 누가 그 위에 서냐가 중요합니다. 저명 감독이 연출하고(하거나) 스타 배우가 나온 수작이 영화제에서 세계 최초로 상영되면 영화제의 위상이 높아집니다.
베니스영화제는 1932년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영화제입니다. ‘선점 효과’는 꽤 오래 갔습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6년 프랑스에서 칸국제영화제가 출범했으나 여전히 세계 최고 영화제의 명성을 이어갔습니다. 베를린국제영화제가 1951년 생기며 위상을 위협했으나 세계 주요 영화제의 자리를 지켜 왔습니다.
2000년대 들어 베니스영화제의 위상은 추락했습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1936~2023) 총리가 집권한 후 알베르토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이 물러난 영향이 컸습니다. 프로그래머를 비롯해 많은 스태프들이 쫓겨나거나 사퇴했습니다. 2006년 때마침 로마국제영화제가 출범해 베니스영화제와 비슷한 시기에 개최된 악영향이 크기도 했습니다. 베니스영화제는 세계 3대 영화제 범주에 넣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위상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베니스영화제는 2010년대 들어 옛 위상을 되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고, 2010년대 후반 반전의 계기를 잡았습니다. 넷플릭스 영화들이 베니스로 향하면서 명성을 다시 얻기 시작했습니다. 할리우드 유명 감독과 스타 배우들의 베니스행이 늘자 세계 영화계가 베니스영화제를 다시 눈 여겨 보고 있습니다. 레드카펫 행사가 영화제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영화제를 빛내는 건 결국 좋은 영화와 화제작입니다. 베니스영화제의 부침은 너무나 뻔해서 잊기 마련인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합니다.
베니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박지현 "혁신당 '성비위' 조국 해명? 자기변명 가까워"직격 | 한국일보
- 한국선 '패드립(가족욕)' 난무하는데···중2가 초4에게 '인터넷 윤리' 가르치는 국가 | 한국일보
- "北 김정은 손목엔 2000만 원 스위스 시계… 김여정은 디올백" | 한국일보
- 조국, 강미정 대변인 탈당에 "후회…비당원 신분이라 할 수 있는 역할 없었다" | 한국일보
- 불붙은 '보완수사권' 논쟁... 개혁 대상 검찰도 침묵 깨고 '폐지 반대' 표명 | 한국일보
- 다시 타오른 북중 브로맨스…"김정은, 중국 통한 경제 회복 노려" | 한국일보
- '건당 2만원' 고액 알바의 덫… 2030, 마약 나르다 감옥 간다 | 한국일보
-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 조르조 아르마니 사망... 향년 91세 | 한국일보
- 위헌 우려에도 '특검·특판' 법사위에 태운 민주당... 쌍끌이 직진 | 한국일보
- 시진핑 "150세까지 장수 가능"… '72세 동갑' 푸틴과의 사담 포착 |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