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무대 밖 어떤 장면을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은가?" [김소연의 빌런들]
편집자주
현실에선 피해야 할 상대지만 무대 위의 빌런은 작품의 밀도를 높이는 중요한 축입니다. 공연 담당 김소연 기자가 매력적인 무대 위 대항자들을 새롭게 조명합니다.

그날 밤, 누군가 강하게 "아니요"를 외쳤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최근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12·3 불법계엄과 관련해 내란 방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면서 '방조'라는 행위의 무게가 다시 화제가 됐다. 범죄는 칼을 든 사람만의 몫이 아니다. 침묵과 방관의 협력이 범죄를 완성한다. 때로는 누군가의 범죄를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흥미롭게도 이 ‘방조’의 감각을 그대로 무대로 옮긴 공연이 있다.
영국 제작사 펀치드렁크의 이머시브(Immersive·몰입형) 공연 '슬립노모어'는 관객을 방조자의 자리에 세운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토대로 한 이 공연에서 관객은 살인과 음모를 코앞에서 보지만 결코 개입하지 않는다. 그 순간 관객은 극 속의 공범이 되는 체험을 한다.
맥베스, 욕망과 죄책감의 비극

영국에서 시작된 '슬립노모어'는 미국 보스턴·뉴욕과 중국 상하이를 거쳐 지난달 한국에도 상륙했다. 서울 중구 필동의 옛 대한극장 건물을 개조해 ‘매키탄 호텔’로 이름 붙이고, 건물 전체를 무대로 삼았다. 대사 대신 음악과 몸짓으로 서사를 풀어내는 논버벌(non-verbal) 공연으로, 관객은 100여 개의 방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원작 '맥베스'는 스코틀랜드 장군 맥베스가 예언과 야망에 이끌려 왕위를 차지하지만 비극적 최후를 맞는 이야기다. 셰익스피어의 가장 어두운 비극 중 하나로 꼽히며 야망, 권력, 죄의식 같은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강렬하게 묘사한다.

맥베스는 처음부터 악인은 아니었다. 마녀의 예언과 레이디 맥베스의 부추김에 점차 욕망에 사로잡혀 악한 행동을 저지르고, 죄책감과 환각에 시달리다 결국 파멸에 이른다. 이처럼 복합적인 내면은 야망과 도덕적 타락의 상징으로 자주 인용되며 현대 관객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지난해 황정민이 주연한 연극 '맥베스'는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그 보편성을 입증했다.
이 상징적 인물, '맥베스'는 '슬립노모어'라는 이머시브 무대에서 새로운 옷을 입는다. 피와 어둠, 광기, 마녀 등 원작의 모티프는 무용과 공간 미장센으로 극대화돼, 관객이 직접 그 한복판을 거닐며 체험하도록 설계됐다. 공연의 한국 제작사 미쓰잭슨의 박주영 대표는 "맥베스의 권력욕을 제대로 보여주려면 그 원천인 인간의 욕망을 시각적·물리적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공연 제목 '슬립노모어'는 맥베스의 죄책감과 불면의 저주를 상징하는 원작 희곡 속 대사에서 따왔다. 공연 연출가이자 펀치드렁크 창립자인 펠릭스 배럿은 "맥베스의 미신과 정신착란, 초자연적 세계를 표현하고 싶었다"며 "깨어 있음과 잠듦 사이의 모호한 경계, 마법적인 감각을 무대에 담고자 했다"고 부연했다.
방조의 쾌감, 무대 위 실험

하지만 '슬립노모어'의 진짜 빌런은 맥베스가 아니라 어쩌면 관객이다. 맥베스가 욕망에 이끌려 타락하고 죄책감에 괴로워하다 파멸에 이르는 동안 관객은 호텔 방을 뒤지며 살인의 흔적과 광기를 지켜보는 방조자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입장과 동시에 받게 되는 흰색 가면 덕분에 가능해진다. 영화 '스크림'의 '고스트 페이스'를 연상시키는 가면은 관객에게 익명성을 제공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타인의 공간을 침범하게 만든다. 살인의 흔적과 광기를 더 가까이에서 구경하는 순간, 방조는 하나의 쾌감으로 바뀐다. 더 나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개인적 공간을 과감히 포기하고 맥베스의 죽음마저도 하나의 스펙터클로 소비한다. 미국 인터넷 매체 슬레이트는 이 공연을 두고 "(맥베스 측으로부터 살해당하는) 레이디 맥더프의 죽음을 침묵 속에 지켜보며 관객은 스스로의 공범적 성향을 성찰하게 된다"고 언급했다. 공연학 연구자인 콜린 루아 미 플로리다대 교수도 몰입형 공연의 관객에 대해 묻는 서면 질의에 '관객-캐릭터(spect-character)'라는 용어로 답했다. 그는 "이들은 구경꾼이 아니라 감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반응을 되돌려주는 역할을 한다"며 "단순한 방관이 아닌 공모 여부를 둘러싼 복잡한 협상 과정 속에 놓이게 된다"고 설명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출연자의 갈등과 눈물을 ‘볼거리’로 포장하듯, 이 공연은 살인과 광기를 놀이처럼 소비하게 하기도 한다. 리얼리티쇼는 카메라와 편집을 거치지만 '슬립노모어'는 관객이 직접 발걸음을 옮기고, 선택한 시선만큼 이야기를 경험하게 돼 더욱 강렬하다. 포브스는 "즉각적이고 손쉬운 접근, 그리고 반복적인 사생활 침해가 난무하는 시대에 연극도 현실 드라마와 경쟁하기 위해 진화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관객이 빌런이 된 순간

법정에서 방조는 죄를 입증하기 어려운 혐의지만 무대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예술에서 방조자는 가장 은밀한 빌런이다.
악당은 곧 범죄자로 단순화했던 과거와 달리 최근 문화 콘텐츠에서 '악은 한 개인의 행위가 아닌 구조적 협력 속에서 완성된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따라서 방관자, 무능한 제도, 침묵하는 대중까지 함께 빌런의 범주에 넣는 서사가 힘을 얻고 있다.
'슬립노모어'는 ‘악역’을 한 인물의 욕망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권력의 잔혹함, 은밀한 공모, 그리고 그것을 침묵 속에서 바라보는 관객까지, 모두가 빌런의 일부가 된다. 콜린 루아 교수는 "'슬립노모어' 같은 몰입형 공연은 관객에게 공모의 책임감, 때로는 죄책감까지 불러일으킨다"며 "이 경험은 극장 밖 현실에서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외면하거나 공모하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고 짚었다. 리얼리티쇼처럼 타인의 갈등과 고통을 소비하는 시대, ‘슬립노모어’는 관객을 향해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당신은 무대 밖에서도 어떤 장면을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은가?"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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