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 굶겨 죽인 집단처벌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 [.txt]

조일준 기자 2025. 9. 5. 05:06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가혹한 곡물 몰수로 육체와 정신 파괴
스탈린, 농장집단화 구실 삼아 수탈 강화
비극 60년 지나서야 공식 기억과 추모
1930년대 초 우크라이나의 한 농가에서 식량 징발단이 땅속에 파묻어 숨긴 곡물을 찾아냈다. 글항아리 제공

농장과 집안, 거리와 마을 곳곳에 죽음이 널렸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지 정확한 수치는 아무도 모른다. 1932년 봄부터 이듬해 1933년 여름까지 불과 1년 새 350만~500만명이 숨졌을 것이란 추계가 있을 뿐이다. 대부분 굶어 죽었다. 굶주림은 먼저 육체를 파괴했고 그다음엔 영혼을 집어삼켰다. 목숨줄 같던 가축들을 빼앗기거나 먹어 치웠고, 개구리의 씨가 마른 뒤에는 아사자의 인육을 먹기 시작했다. 급기야 어린 자녀를 희생물로 삼은 충격적 사례도 목격담과 증언이 여럿 나왔다.

옛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에서 있었던 참극이다. 사건 당시와 직후엔 건조하게 ‘대기근(Famine)’으로 묘사됐다. 그러나 얼마 안 지나 우크라이나 디아스포라 지식인과 서구 학자들은 ‘홀로도모르(Голодомор, 영어 표기는 holodomor)’라는 신조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어 ‘홀로드(holod, 굶주림)’와 ‘모르(mor, 죽음·전염병)의 합성어다. 말 그대로 ‘굶겨 죽인다’는 뜻이다.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위적 학살이라는 의미가 담겼다. 처참한 떼죽음은 전시도 아닌, 평시에 시행된 사회주의 계획경제 ‘정책’의 결과였다.

붉은 굶주림 l 앤 애플바움 지음, 함규진 옮김, 글항아리, 4만8000원
미국의 탐사 저널리스트이자 역사 저술가 앤 애플바움. 본인 페이스북 갈무리

미국 탐사 저널리스트 앤 애플바움이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 참상을 정면으로 다룬 ‘붉은 굶주림’(2017)이 우리말 번역본으로 나왔다. 애플바움은 러시아와 중동부 유럽 현대사에 정통한 역사 저술가이기도 하다. 앞서 2003년 ‘굴락: (소련 강제수용소의) 역사(Gulag: A History)’는 이듬해 퓰리처상(논픽션 부문)을 받았다.

본디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곡물창고로 불릴 만큼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곡물 생산을 자랑한다. 그런 땅에서 단 1년 새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 애플바움은 방대한 기록물과 다수의 생존자 증언, 당시 소련 비밀경찰 보고서 등을 교차 검증하며 우크라이나 기근이 단순히 ‘실패한 정책’이 아니라 ‘의도된 범죄’였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동유럽 현대사 전문가 티머시 스나이더 미국 예일대 교수는 애플바움의 ‘붉은 굶주림’보다 2년 앞서 선 저작 ‘블랙 어스(Black Earth)’에서, 우크라이나와 인접 지역을 ‘검은 땅(흙)’에 비유한 바 있다. 유럽을 배불리 먹일 ‘비옥한 흑토 지대’이자, 바로 그 이유로 소련과 나치 독일이 유린한 ‘죽음의 땅’이 됐다는 중의적 의미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인근 상공에서 내려다본 평원 지대.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토양과 풍부한 곡물 생산으로 유명하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애플바움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 사이의 갈등사를 짚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홀로도모르 사건은 1930년대 초반이었지만 비극의 뿌리는 길고 깊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13세기 이후 수백 년 동안 ‘제국의 변방’으로 취급됐다. ‘우크라이나(Ukraine)’라는 말 자체가 현지어로 ‘변경, 변방’이란 뜻이다. 근대 이후만 보면, 1795년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각각 동부와 서부를 분할 점령하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질긴 악연이 본격화했다. 천연 국경이 없는 대평원 지대라는 지리적 특성은 끊임없이 주변 강대국들에 치이느라 독립국을 세우기 힘든 요인이 됐다.

18~19세기 들어 유럽의 근대 국민국가 열풍이 불면서 우크라이나에서도 민족 정체성이 뚜렷해졌다. 그러나 러시아는 단 한번도 우크라이나를 주권국가로 인정한 적이 없다. 우크라이나의 민족 운동은 러시아 황실에는 제국의 통일성에 대한 위협이었다. 우크라이나 언어와 역사 교육, 우크라이나인의 집회·결사가 금지됐다.

이오시프 스탈린(왼쪽 두번째)와 그의 볼셰비키 측근들. 글항아리 제공

1917년 11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으로 제정이 붕괴했다. 이후 5년 동안 이어질 적군(볼셰비키 혁명군)과 백군(반혁명 세력 연합)의 내전이 시작됐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은 1918년 1월 독립국 수립을 선포했다. 레닌은 즉각 ‘붉은 군대’를 보냈다. 여기에 독일과 폴란드가 개입하면서 사태는 외세와의 전쟁으로 번졌다.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패전해 영토 일부를 폴란드에 내어준 뒤 1922년 러시아가 주축인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 창립 회원국으로 편입했다.

내전 시기 볼셰비키 지도부는 소련 전역에 ‘전시 공산주의’ 체제를 운용했다. 토지를 비롯한 생산수단 국유화, 곡물의 강제 징발과 배분, 엄격한 노동 통제와 배급제가 시행됐다.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부농뿐 아니라 땅과 수확물에 집착하는 평범한 농민까지 ‘계급의 적’으로 규정하고 집단농장화를 밀어붙이며 곡물을 가혹하게 징발했다. 농민들은 필사적으로 곡식을 지키고 감췄지만, 비밀경찰과 징발원들은 감자 한알, 옥수수 한줌, 심지어 내년에 심을 종자 한알까지 털어 갔다.

1930년대 초 우크라이나의 한 마을에서 쿨라크(부농)의 재산이 경매에 부쳐지고 있다. 글항아리 제공

곡물 생산이 급감할수록 집단화 압박과 식량 수탈은 더 난폭해졌다. 스탈린은 곡물 위기와 대중의 경제적 불만을 정적 제거와 권력 독점의 수단으로 삼았다. 1930년께부터 농민 반발이 잇따랐다. 굶어 죽는 사람들도 늘기 시작했다. 그해 소련 문서에는 각각 1만3700여건의 ‘테러’ 사건과 ‘대규모 시위’가 기록됐는데, 대부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났다.

1932년 들어서 비극은 본격화했다. 그해 여름 내내 스탈린은 소련 전역의 비밀경찰로부터 “전면적 집단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거나 “반혁명단체를 발견했다”는 보고서를 전달받았다. 스탈린은 최측근에게 “우크라이나를 소련의 모범 공화국으로 신속히 변모시키는 임무”를 지시했다. 지은이는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고의로 더 심각한 위기를 조성”했다고 평가했다. 움직일 힘조차 잃은 사람들이 길바닥에 앉아 죽었다. 거리와 기차역에도 주검이 흔해졌다. 굶주린 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떠나면서 공동체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당국은 밤이면 산 자와 죽은 자를 한꺼번에 트럭에 싣고 들판 구덩이나 계곡에 던져버렸다.

1933년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의 거리에 굶어죽은 사람들의 주검이 방치돼 있다. 산 자들은 이미 죽음에 무감각해진 상태였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극심한 기아는 인간성까지 갉아먹고 다른 종류의 죽음을 낳았다. 살아남기 위한 절도는 일상이 됐고, 빵 한 조각을 차지하려 싸우다 죽었다. 자녀가 굶어 죽는 걸 볼 수 없었던 농부는 제 손으로 자녀의 목을 졸랐다. 자경단은 이삭 줍는 소녀까지 현장에서 사살했다. 책에는 처참한 죽음을 증언하는 사례들이 넘쳐난다. 우크라이나인들은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1993년 다시 독립국가를 세운 뒤에야 자국의 역사를 토론하고 추모할 자유를 누리게 됐다. 꼭 60년이 지나서였다.

1945~1946년 나치 전범 재판 당시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용어를 고안한 법학자 라파우 렘킨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제노사이드의 고전적 사례”라고 말한다. 제노사이드는 한 민족 집단(genos)의 말살을 목적으로 한 대량 학살(cide)이다. 지은이는 홀로도모르가 이 기준을 충족하진 않는다고 본다. 중요한 건 “결국 스탈린이 실패했고 1930년대 우크라이나 지식인과 정치인 세대 전체가 살해당했지만 그들의 유산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2000년대에는 새로운 세대의 우크라이나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다시 등장했고 우크라이나인들은 기억에 힘입어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