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형의 책·읽·기] 조선 외교통 활약…김용원·규식 부자, 근대로 나아가다

김진형 2025. 9. 5. 00:07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규식과 그의 시대 (상)]
홍천출신 김용원 일본서 사진기술 습득
초기 개화파·러시아 극비임무
아들 김규식 16세 미국 유학행
▲ 언더우드 보호하의 ‘존’ 김규식(1886).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조선말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급변하는 시대에 ‘외교통’으로 활약했지만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아버지는 1842년 홍천에서 태어나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도화서 화원으로 일했고, 일본 수신사 일행에 동참해 개화기의 물꼬를 텄다. 아들은 1881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 1885년 네 살 무렵 부친이 유배형을 당하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사실상 고아가 됐으나 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 지성을 겸비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다.

아버지는 김용원(1842~1894·개명 전 김지성), 아들은 김규식(1881~1950)이다.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 특사로 3·1운동의 폭발력을 키우고 구미위원부 위원장과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지만, 좌우합작 실패 등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일화를 제외하면 여전히 알려지지 못했다. 김규식보다 먼저 외교관으로 활동한 홍천 출신 김용원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가 ‘김규식과 그의 시대’(사진)를 펴냈다. 김규식과 주변 인물을 3권 1872쪽에 달하는 분량으로 펼쳐낸 평전으로 출생과 가계 등 기존 연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내용이 구성됐다. 본지는 두 차례의 연재를 통해 평전을 소개, ‘인간 김규식’의 면모를 되짚는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짧지만 선각자의 경험을 남겼고 나라를 위하는 부자의 마음은 상통했다.

▲ 김규식의 아버지 김용원. 뒷면에는 “조선국 선략장군 경상좌도 수군우후 김용원 자 선장 호 미사 본관 청풍 연령 40세”라고 적혀 있다.

■김용원:어진화가에서 최초의 사진사로, 조러밀약 수행까지

분명 김규식에 대한 책이지만, 아버지 김용원의 삶 또한 파란만장하다. 그는 화원, 외교관, 실업가, 과학자, 사진사였으며 충군애국 하는 전통적 미덕의 소유자였다.

한학에 정통했던 김용원은 1856년부터 1875년까지 도화서 화원으로 의궤 제작과 철종 어진 제작에 참여하는 등 인정받는 화원이었다. 특히 1876년 일본으로 향하는 1차 수신사 일행 참여는 세계정세에 눈을 뜨게 된 계기였다. 당시 역할은 그림으로 기록으로 남기는 화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곳에서 여러 공장을 시찰했고 사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림으로 기록을 하던 그가 사진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현재의 AI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가늠해 본다.

일본을 다녀온 후 고종의 측근으로 등용된다. 1879년 12월 4일에는 훈련원 판관, 전라우도 수군우후, 경상좌도 수군우후로 세 차례나 관직이 변경되는 등 파격 승진한다. ‘외교통’으로 각인된 김용원은 경상좌도 수군우후로 부산 동래 왜관을 살피며 일본의 근대적 문물을 조사한다. 일본인 기사를 초청해 유리제조장을 설립하고, 사진 촬영술을 습득했다.

김용원은 1881년 조사시찰단원으로 다시 일본에 간다. 유길준, 윤치호 등 대표적인 개화파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국내로 돌아온 1883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관인 ‘촬영국’을 설립, 한국 사진사의 첫 발을 내디딘다.

김옥균, 박영효 등과는 거리를 두었기에 갑신정변 이후인 1884년 러시아 밀사로 등용돼 5개월간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돼 비밀외교를 담당한다. 러시아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조정 대신들도 알지 못하는 극비 임무였으나 청과 일본에게 사건이 알려지게 된다.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던 청일 양국은 러시아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상세한 내부정보를 이미 공유하고 있었다.

국제 분쟁에서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만 했고, 고종이 역할을 떠맡을 수는 없었다. 고종은 김용원에게 “미천한 부류들로서 은밀히 서로 드나들며 또한 참견한 것이 많다”며 유배를 내린다. 1891년 김용원이 6년간의 유배를 끝내고 아들 김규식과 홍천에서 1년 정도 함께 살았으나, 유배 중 얻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그의 묘는 홍천 화촌면 구성포리에 있다.

▲ 홍천 화촌면에 있는 김용원의 묘. 왼쪽 비석은 김규식이 귀국한 1947년에 세운 것이다.

■김규식:고아에서 미국 유학생 ‘존’이 되다

평전은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에 있는 1886년 김규식의 어린시절 이야기로 시작된다.

해외선교 후원을 받고자 고급스럽게 연출한 복식과 달리, 김규식의 유년기는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투쟁의 연속이었다.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한 고아원에 머무르기에는 너무 어려 집에 돌려보내자 굶어 죽기 직전까지 방치됐다. 얼마 후 언더우드가 다시 만난 소년은 연유깡통을 물어 뜯고, 벽의 벽지를 찢어 먹으려고까지 했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하자 가족들은 흔쾌히 승낙했다. 언더우드는 “깨지기 쉬운 그릇 속에서 아직까지 가물거리는 연약하고, 깜빡이는 작은 생명의 불꽃”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다시 고아원으로 들어간 김규식은 한국어로 ‘본갑이(번개비)’, 영어로는 ‘존’이라고 불렸다. 총명했던 덕택에 통역까지 맡으면서 총애와 보살핌을 받았다. 14세에는 서울관립영어학교에 입학, 16세에 일본을 통해 미국으로 떠난다. 의화군(의친왕)의 도미 유학행 통역 겸 시종 자격이었다. 고아 소년 ‘존’의 여정이 시작된 때였다.

저자는 “정치적 성패로 따지자면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역사이지만, 김규식의 삶 속에 담겨 있던 진정성과 꺼지지 않는 불꽃 같은 열정의 순간들이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했다.

김진형 기자 formation@kado.net

 

#김용원 #김규식 #외교통 #김진형 #아버지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