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홍 역사 장편소설 죽창 [제11장] 전주성 입성(223회)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영감이 체념하듯 말하였다.
"성은 달라도 자네는 내 아들이고 사위일세. 안긍가?"
"그라지라우. 잘 모시겄습니다."
"나는 괜찮응개 며늘아 그를 잘 보살펴 주어야제. 불쌍한 아그여. 내 체면 땀시 고상이 많았네."
그러자 며느리가 "아부님" 하며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아가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운명이란 것이 그런 것인디 어쩌겄냐. 저 사람이 엽엽하고(착실하고) 수말스러웅깨(믿음직스러우니까) 안심이다. 동학군 대장이 비민히(어지간히) 골라줬겄냐마는, 실로 개가(改嫁)는 잘한 것 같다. 나가 섭섭혀도 며늘아 그가 향복하면 나도 향복하다. 그러니 울들 말고, 걱정하들 말고, 신랑 따라가서 알콩달콩 향복하게 살어라. 고것이 내 죽은 아들자식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도 서넛 낳아 부러라. 그중 하나는 우리 집안에 들이고 말이다. 알것냐?"
며느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섧게 울고, 전규덕이 넙죽 엎드려 다시 인사를 올렸다.
"어르신, 부처님 모시댁기 하고 향복하게 살랍니다."
"당연시 그래야제. 혹여 필요한 것이 있는가?"
신혼살림에 뭔가를 지원해 주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전규덕의 답변은 의외였다.
"어르신, 사실은 동학군사에게 군량이 필요합니다. 군세(軍勢)는 나날이 불어나는디 군량미가 부족하지요. 젊은 군사들이 먹성 하나는 게걸스러운디 싸우러 다니다 보면 늘 허기가 집니다."
"그럴 것이네. 매일같이 황토벌, 산구렁창, 산등성이에서 훈련을 한다는 디 한 끼니 먹고 돌아서면 곰방 허기가 져불제. 쌀 오십 가매를 주겠네. 개비해갈 수 있겄는가?"
"운반을 해야지요."
"운반을 해야겄제. 그란디…"
영감이 고개를 갸웃하자 전규덕이 자신 있게 말했다.
"군량미 오십 가매면 동학농민군 오십명을 차출하면 되것구만이요. 군사 하나가 쌀 가매 하나씩 등짐 지고 운반하면 되것습니다."
"그것은 안되네."
영감이 단박에 거절하였다.
"왜 안된다는 것입니까, 어르신."
"이 사람아 누굴 잡자고 오십 명이나 동원한단 말인가. 군사들이 한 가매 씩 등짐을 지고 전주성까지 주욱 이동하게 되면 곰소항의 김판동 영감이 동학군에게 군량미를 댔다네, 하고 소문날 것 아닌가. 그러면 나가 살았다 할 것인가? 관아에서 나를 뭘로 보것는가. 같은 동학패로 몰아서 하루아침에 집안을 아작 내불 것이네."
"그럴 것이겠구만이요."
전규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소달구지가 있어서 한꺼번에 실어가버리면 깨끗하게 해결되는데, 오십 명의 장정이 쌀가마니를 지고 일렬종대로 수백 길 걸어나가면 곰소항 영감이 동학 패거리요, 하고 유세를 떠는 것이나 같다.
헌데 소달구지가 지나다닐 길이 나있지 않다. 길이 발달하지 못하여 소달구지는커녕 사람 다니는 길조차 번듯하게 나있지 않다. 이것을 전규덕은 늘 애석하게 생각해왔다. 나라가 개화되고 발전하려면 길부터 닦아야 하는데, 고작 여우나 족제비가 다니는 길과 같은 소롯길이 이어질 듯, 끊어질 듯 힘겹게 나있는 것이다.
전규덕은 장차 한양을 접수하여 나라를 새롭게 세우면 맨 먼저 길부터 넓게 닦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군사들을 동원하고, 고을 청년들을 징집하여 이웃과 이웃이 쉽게 소통할 수 있도록 길을 내고, 그것도 소달구지가 다닐 정도로 길을 넓혀 풍부한 물동량이 운반되게 한다. 그러면 각 지역의 물산이 풍부하게 유통되고, 그런 가운데 상업도 발달할 것이다.
"아버님, 곰소항 소금배에 쌀 가매를 실으면 변산반도를 지나 만경강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면 전주성 입성이 수월히 되겠고만이요."
며느리가 눈을 반짝이며 대안을 내놓았다. 만경강은 전라도 완주군 동상면 사봉리 밤샘에서 발원하여, 호남평야와 서해로 흐르는 강이다. 강은 수량이 풍부하고, 하류에는 바닷물이 들어와 농사짓기가 어려우나 뱃길이 발달하여 완주까지 배가 드나드는 것이다.
"그렇구나. 너는 어찌 그리 생각도 매시럽냐(실하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