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노] 사람이 자초한 ‘0.1초의 재난’

권혁범 기자 2025. 9. 4.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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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육역’이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아마 생경한 단어일 겁니다. 위에 붙인 부산 지도를 먼저 보시죠. 2017년에 기획 보도를 위해 지리정보시스템(GIS)으로 직접 그린 건데요. 좀 촌스럽기도 하고 업데이트해야 할 부분이 다소 있지만, 전반적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겠습니다.

해안선을 따라 옅은 하늘색이 보이시죠. 이 부분이 바로 연안육역입니다. 해안선에서 육지 쪽으로 500m 이내 지역을 말합니다. 항만이나 산업단지가 있으면 1000m 이내로 범위가 넓어집니다. 동구 쪽 북항 등 항만이 있는 곳에 하늘색이 좀 더 두껍게 칠해진 이유입니다. 연안육역은 해양수산부와 지자체의 엄격한 관리를 받습니다. 개발 행위에 제한이 있고, 건축물·공작물을 설치하려면 규모에 따라 환경영향평가를 필수로 받아야 합니다. 해안가를 보전하고 침식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죠.

이제 부산 상황을 살펴볼까요. 연안육역 지정 취지와는 다른 결과가 확인됩니다. 작은 동그라미들은 색깔에 따라 30~39층(노랑), 40~49층(주황), 50층 이상(빨강) 건물을 나타냅니다. 해운대구와 수영구 쪽 해안가에 고층 건물이 집중됐습니다. 연안육역에서 무분별한 개발이 이뤄진 겁니다. 특히 40층이 넘는 주황색, 빨간색 동그라미가 해안선 근처 연안육역에 몰렸습니다. 위 지도를 만들 당시엔 최고 101층으로 치솟은 해운대구 중동 엘시티는 준공되기도 전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해안선 색깔이 다르죠. 초록색과 주황색으로 구분됐는데요. 초록색은 손대지 않은 자연해안선, 주황색은 개발과 매립 등으로 만들어진 인공해안선입니다. 섬을 제외한 육지 쪽만 계산했을 때, 전체 해안선 중 인공해안선이 56.5%에 달합니다. 항만의 특성이 있긴 하지만, 동구와 중구엔 자연해안선이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지금은 비율이 조금 달라졌을 수 있지만, 큰 변화는 없을 겁니다.

지난 7월 11일 국제신문 취재팀이 부산 해운대구 초고층 건물 사이에서 ‘빌딩풍’ 순간 풍속을 계측하고 있다.전민철 기자 jmc@kookje.co.kr


부산은 무분별한 개발의 대가를 여러 형태로 치릅니다. 최근 들어 골칫거리가 된 빌딩풍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초고층 건물이 늘어선 해운대구 해안가는 ‘바람의 터널’이 됐습니다. 건물 사이를 통과하는 빌딩풍이 재난급 강풍으로 몰아칩니다. 기후변화까지 더해지면서 빌딩풍 세기가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국제신문 취재팀이 지난 7월 11일 부산대 권순철 교수 연구팀과 함께 해운대구 중동 엘시티 건물 사이에서 미포 방면 순간 최대 풍속을 쟀습니다. 무려 66.9㎧. 1분 평균 풍속도 58.4㎧에 달했습니다. 내륙 방면 뒤편 역시 30~40㎧급 돌풍이 관측됐습니다. 인근 마린시티에서도 건물 사이로 해안가 방면과 시가지 쪽 순간 최대 풍속이 각각 21.2㎧, 18㎧로 계측됐습니다. 이날 해안가에 분 다소 강한 바람(오후 2시 해운대구 우동 일원 기준 순간 최대 풍속 13.8㎧)이 초고층 빌딩 사이를 통과하면서 훨씬 더 강력해진 겁니다. 기상청은 순간 최대 풍속이 20㎧로 예상되면 강풍주의보를 내립니다. 26㎧ 이상이면 강풍경보를 발령하니, 엘시티 주변엔 재난급 강풍이 불어닥친 셈입니다.

부산처럼 해안가에 초고층 건물이 밀집한 도시는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다고 합니다. 50층 이상 또는 최고 높이 200m가 넘는 건물은 해운대 해안을 낀 우동과 중동에만 13개 동이 있습니다. 부산의 50층 이상 건물은 41개 동으로, 전국(142개 동)에서 제일 많습니다. 전국 31층 이상 건물 4756개 동 중에도 부산에 가장 많은 700개 동이 있습니다.

빌딩풍의 무서운 영향력은 점점 내륙으로 뻗어갑니다. 해안가 바람길이 빠르게 확장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순간의 재난’으로 부산을 덮칠 우려가 커집니다. 0.1초 찰나의 순간에도 바람은 상상할 수 없는 피해를 남깁니다. 빌딩풍은 우리가 자초한 ‘재난’입니다. 이대로 두면, 해안가는 물론 도심을 집어삼킬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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