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죽은 한국을 ‘제2조국’ 삼아… 미군 최고 파이터, 끝내 서울을 지켰다 [명장]
⑦1951년 4월 밴플리트: 서울 사수의 주역
편집자주
6·25 전쟁 75주년 기획 ‘명장’은 대한민국을 구한 장군들의 ‘가장 빛나던 순간’을 조명합니다.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고 전황을 뒤집은 리더십의 성공 비결을 알아봅니다.

워커가 죽었다.
4성 장군의 사망을 애도하는 17발 예포가 알링턴 국립묘지의 영하 3도 차가운 공기를 갈랐고, 성조기에 싸인 워커의 관이 여섯 마리 백마에 이끌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1951년 1월 2일이었다. 장례식을 찾은 미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 대장의 머리는 온통 한국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8군사령관 월튼 워커(대장 추서)는 1950년 12월 23일 서울 북방을 순시하다가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그 후임으로 미 육군 최고의 엘리트 장성 매슈 리지웨이를 한국으로 보냈지만, 콜린스는 마음을 놓지 못했다. 두 달 전 중공군이 개입한 이후 한국의 전황은 절망적이었고, 더구나 리지웨이는 별을 달고도 거침없이 낙하산 점프(노르망디 상륙)를 뛰는 겁 없는 장군 아닌가. 리지웨이의 유고를 대비해 ‘다음 구원투수’를 준비해 둬야 했다. 그래서 워커 장례식에서 만난 어느 장군에게 몸을 풀고 있으라고 귀띔했다.
“장군, 이건 정부에서 단 세 명만 아는 극비사항이오. 리지웨이 다음으로 한국에 갈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국방장관, 육군장관, 육군참모총장만 아는 비밀을 네 번째로 알게 된 ‘차기 8군사령관’은 바로 제임스 밴플리트 중장(당시 미2군사령관)이다.

목숨 걸었던 미8군사령관들
당시 상황이 어땠기에, 육군참모총장이 야전군사령관의 유고까지 대비해야 했을까? 이건 당시 미8군사령관들이 모두 빗발치는 총탄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장’이었다는 점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흔히 대장이나 중장 정도 되는 고위 장성들은 후방이나 안전한 기지에서 명령만 내리느라 생명을 위협받을 일이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6·25 전쟁 당시 사령관들은 목숨을 걸고 전선을 돌고 또 돌았다. 사고로 순직한 월튼 워커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평균 네 시간 경비행기를 타고 전방 부대를 순시했으며, 1950년 9월엔 전선이 교착된 상태에서 2인승 비행기에 몸을 싣고 적진 안으로 120㎞를 들어간 적도 있다.
겁이 없기는 워커 후임자도 마찬가지였다. 현장 시찰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매슈 리지웨이는 1951년 3월 유엔군 재반격 당시 파주에서 공수작전이 펼쳐지던 급박한 현장에 경비행기를 타고 내렸다. 비행기를 많이 탔던 리지웨이가 조종사 실수로 추락사고에 휘말릴 뻔한 적도 있었다. 더글러스 맥아더가 유엔군사령관에서 해임된 1951년 4월 리지웨이는 육군장관 전용기(록히드 컨스텔레이션)를 빌려 타고 도쿄에 다녀왔는데, 대구(8군사령부)로 돌아오던 중 조종사가 비행장을 착각해 하마터면 산에 충돌할 뻔했다. 아마도 장관 전용기 조종사가 캠프워커 비행장(K-37)을 대구비행장(K-2)으로 착각해서 벌어진 일로 보인다. 유엔군은 4개월 만에 또 지상군사령관을 불의의 사고로 잃을 수도 있었다.
세 번째 8군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도 동해안에서 알레이 버크 제독(1955년 해군참모총장 취임)과 헬기를 타고 순양함으로 가다가, 돌풍 때문에 헬기가 추락 직전까지 가는 아찔한 상황을 겪었다. 이 밖에도 밴플리트는 작전 회의를 위해 L-19 경비행기를 타고 대관령 간이활주로에 내리다가, 기체에 적의 총탄을 맞고 가솔린을 줄줄 흘리는 채로 착륙(백선엽 증언)한 적도 있었다.
장진호 전투 영웅인 미해병1사단장 올리버 스미스도 격전지를 순시하다가 헬기가 잠시 중심을 잃는 바람에 땅에 불시착하는 사고를 당했다. 리지웨이, 밴플리트, 버크, 스미스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미 9군단장 브라이언트 무어 소장은 1951년 2월 헬기가 여주 남한강에 추락하며 사망했다.
“나는 미군 총사령관으로서 귀관을 유엔군사령관 겸 극동사령관에서 해임하게 됨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귀관은 지휘권을 리지웨이 중장에게 바로 이양하라.”
(1950년 4월 해리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 서신)

뚝심의 밴플리트 등판
밴플리트의 구원 등판은 콜린스의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워커 장례식으로부터 불과 3개월이 지난 1951년 4월이었다. 밴플리트 차례가 온 것은 리지웨이에게 변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저 높은 곳에서 엄청난 일이 터졌기 때문이다.
대통령 해리 트루먼과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의 갈등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맥아더는 미국-필리핀 전쟁, 1차대전, 태평양전쟁에서 모두 승리를 이끈 국민 영웅이었다.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8,300만 명 일본인을 통치하는 ‘푸른 눈의 쇼군’이었다. 그 위세와 군사적 성과 때문에 인사권자인 대통령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미국 역사에서 이렇게 강력한 권한을 쥔 군인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게다가 당시는 패배 직전의 한국전쟁을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으로 단숨에 뒤집으며 ‘전쟁의 신’으로 떠오른 때였다. 34년째 장군인 맥아더의 눈엔 주방위군 장교 출신 트루먼의 군사적 역량은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그렇더라도 문민통제(민간 권력이 군 통제권을 가짐) 원칙을 지켰어야 했지만, 맥아더는 트루먼을 존중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 트루먼과 맥아더 사이 불신은 6·25 전쟁 초반부터 쌓이고 있었다. 맥아더는 트루먼 행정부의 외교 방침이나 전쟁 전략에 반하는 성명을 수시로 발표했고, 언론 인터뷰에서 대통령 뜻과 다른 발언을 계속했다. 심지어 맥아더는 트루먼의 대만 정책에 반대하는 내용의 편지를 야당(공화당) 유력 하원의원에게 보냈는데, 이 편지가 의회에서 공개되어 트루먼이 매우 곤란한 상황을 겪었다. 미 합동참모본부는 공식 기록에서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정중히 경고하거나 특사를 파견해 의도를 설명하는 등 노력을 다했다”면서 “그럼에도 맥아더는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담은 성명 발표를 멈추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나는 맥아더가 멍청한 개자식이라서 해고한 게 아니다. 그가 대통령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자식인 건 사실이지만.”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

참고 또 참던 트루먼은 맥아더를 그대로 둘 수 없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조지 마셜 국방장관, 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 3군참모총장과 협의 후 1951년 4월 11일 새벽 1시 맥아더 해임을 전격 발표했다. 대통령보다 장군의 인기가 높았으니, 당연히 미국 여론은 들끓었다. 의회에선 트루먼 탄핵 논의가 터져 나왔고, 캘리포니아주 샌가브리엘에선 시민들이 트루먼 인형을 만들어 목을 매달았다. 그러나 인사권은 어쨌든 대통령의 전권. 맥아더는 군복을 벗어야 했다. 물론 이렇게 여론을 잃은 트루먼의 민주당은 다음 해 대선에서 공화당(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 승리를 내줘야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리지웨이가 맥아더 후임으로 임명됐다. 그렇게 공석이 된 8군사령관에, 콜린스의 계획대로 밴플리트가 즉각 투입됐다.

콜린스는 밴플리트의 육사 2년 후배였지만, 밴플리트 사용법을 제대로 아는 상관이었다. 1944년 6월 미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할 때 콜린스는 7군단장이었고, 밴플리트는 예하 연대장과 사단장으로 전장을 누볐다. 콜린스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밴플리트는 내 모든 기대를 충족했고, 가장 성과가 낮았던 사단(제90보병사단)을 최고 사단으로 바꿔 놓았다”고 극찬했다.
종전 3년이 지난 1948년 밴플리트는 내전 중인 그리스에 군사고문단장으로 파견돼 정부군의 작전과 훈련을 맡았고, 2년 만에 정부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스 공산 게릴라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던 밴플리트는 여러모로 한국전쟁 사령관으로 적합한 인물이었다.
밴플리트의 이력을 보면 ‘대기만성’이라는 표현이 정확하게 어울린다. 그는 늦게 출세한 장군이었다. 소령에서 중령이 되는 데 12년이 걸렸고, 2차대전 유럽전선 하이라이트였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엔 52세에 연대장(대령)으로 출전했다. 당시 그의 육사 동기(1915년 졸업생) 아이젠하워는 연합군 최고사령관(대장)이었고, 또 다른 동기 브래들리는 1군사령관(중장)이었다. 2년 후배 콜린스(소장)가 밴플리트의 군단장이었다.
진급이 늦었던 이유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조지 마셜의 실수’다. 6·25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브래들리의 자서전을 보면, 미 육군참모총장(1939~1945년)으로 2차대전 승리를 이끈 마셜은 밴플리트와 다른 장교 이름을 혼동하고 있었다. 그 장교의 이름은 밴플리트(Van Fleet)와 매우 비슷한 밴블리트(Van Vliet)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하필 밴블리트는 근무 태도가 불량한 술꾼이었다. 육군 인사권을 쥔 마셜은 밴플리트 대령의 이름이 장군 심사에 올라올 때마다 ‘주정뱅이는 안 된다’며 승진을 반려했고, 밴플리트는 노르망디에서 화려한 무공을 세우고 나서야 별을 달았다.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던 ‘바른 생활 사나이’ 밴플리트 입장에선 억울한 상황이었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마셜은 밴플리트를 준장 진급 100일 만에 소장으로 다시 승진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던 1948년 밴플리트에게 별을 하나 더 달아주며(중장), 냉전의 첫 대결 장소인 그리스에 미군사고문단장으로 파견했다.

“밴플리트는 위대한 장군입니다. 내가 그를 그리스에 보냈더니 전쟁을 이겼어요. 다시 한국에 보냈더니 또 전쟁에서 이기더군요.”
(해리 트루먼 즉석 연설)
팽덕회, 칼을 갈다
다시 1951년 4월 11일로 돌아오자. 맥아더, 리지웨이, 밴플리트 세 장군의 운명이 엇갈리던 이날, 그들은 각자 코앞에 닥친 몰락과 도약의 순간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워싱턴은 맥아더에게 사전에 언질을 주려고 했지만, 정전으로 인한 통신 장애 때문에 해임 사실을 미리 통보하지 못했다. 그래서 맥아더는 귀빈들과 오찬을 하던 중 백악관 공식 발표를 전해 듣는 수모를 겪었다. 리지웨이는 한국을 방문한 육군장관(국방장관 통제를 받아 육군의 모든 업무를 수행) 프랭크 페이스와 함께 전방 순시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종군기자로부터 “(영전을) 축하한다”는 얘기를 듣고 맥아더의 경질을 알게 됐다. 육군 원수의 해임 소식은 육군장관도 이때 처음 들었다.
밴플리트의 운명도 갑자기 바뀌었다. 그는 휴가를 내고 플로리다 농장에서 오렌지 나무를 심다가 참모총장 콜린스의 전화를 받았다. 인사 명령을 받은 밴플리트는 곧바로 워싱턴으로 가 장거리 기종인 컨스텔레이션으로 갈아탄 뒤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웨이크섬, 도쿄(하네다)를 찍고, 4월 14일 낮 12시 45분 대구에 도착했다.
밴플리트가 취임하던 때 표면적인 전황은 나쁘지 않았다. 고삐를 늦추지 않은 리지웨이의 공세 덕분에 북위 37도선까지 밀렸던 전선은 세 달 만에 38선 부근까지 북상했다.

그러나 전선 너머에선, 대장정과 국공내전에서 활약한 중공군의 숙장(宿將) 펑더화이(팽덕회)가 은밀하게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펑은 4월 말 주력을 서울에 집중시켜, 5월 1일 노동절 선물로 마오쩌둥(당시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에게 서울을 바치겠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중공군 5차 공세, 혹은 춘계공세라고 불리는 이 공격에 중공군 및 북한군의 47개 사단, 75만 명의 병력이 동원됐다. 이에 맞선 국군과 유엔군은 21개 사단, 50만 명이었다.
양측 병력 125만. 6·25 전쟁 최대 전투가 밴플리트 한국 부임 8일 만인 4월 22일 시작됐다. 공산군은 이날 오후 38선 부근에서 일제 공격을 개시했다. 5차 공세 목표는 서울(노동절 선물)이었던 만큼, 공산군 공격은 서울 북방에 집중됐다. 어렵게 수복했던 파주·동두천·포천·가평이 다시 넘어갔고, 국군과 유엔군은 행주-수색-구파발-쌍문동-태릉-덕소 라인을 힘겹게 지키고 있었다. 서울 2차 함락(1.4 후퇴) 이후 4개월도 안 돼 서울에 다시 붉은 깃발이 나부끼기 직전이었다. 국군1사단(한강 하구~구파발), 미1기병사단(구파발~쌍문동), 미25사단(쌍문동~덕소)의 활약에 수도 서울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이번에 서울을 잃는다면 되찾기 어려울 수 있었다.
“여러분, 나는 항복하거나 이 나라를 벗어나겠다는 생각으로 온 게 아니오. 나는 이기기 위해 왔소이다. 내 팀에서 일할 생각이 없다면, 지금 즉시 집으로 보내 주겠소.”
(밴플리트가 한국 도착 후 휘하 장군들에게 한 말)

서울을 포기할 순 없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서울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세 번째로 적에게 내줄 것인가. 결정해야 했다.
밴플리트의 상관 리지웨이는 서울을 포기하고 병력을 살려 훗날을 도모하자는 쪽이었다. 철저한 실리주의자인 리지웨이는 서울의 상징성이나 정치적 의미 같은 것은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중공군 3차공세(1.4후퇴) 때도 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서울을 과감히 포기하고, 방어선을 평택-안성 선까지 물려 힘을 회복한 다음 곧바로 반격하는 작전을 선택했다. 작전 차원에서야 그게 나은 방법일지도 모르지만, 한국 입장에서 수도를 내주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은 방어 형태였을 것이다.
워싱턴 입장에서 서울 사수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서울을 지키려다 사단급 이상 미군 병력의 피해를 입게 되면 미국 내 반전 여론이 더 커질 것이고, 한국 파병을 계속하지 못하거나 정권을 잃게 되는 상황에 몰릴 수 있었다. 5개월 전(1950년 11월)에도 미군은 장진호 쪽으로 부주의하게 병력을 올리다가 해병사단 전체를 잃을 뻔했었기에, 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밴플리트는 서울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가 급거 도쿄에서 한국으로 날아왔다. 리지웨이는 서울을 포기하고 한강 남쪽에 방어선을 칠 것을 권했다. 그러나 밴플리트는 육사 2년 후배였지만 직속상관인 리지웨이에게, 자신에 찬 어조로 서울 사수 필요성을 호소했다. “맷(리지웨이), 내가 볼 땐 적들은 어떻게 싸우는지를 몰라요. 뒤에 포병도 없고 공군도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둘 다 가지고 있죠. 우린 바로 여기서(서울) 적들을 끝장낼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정말 자신이 있습니다.”
밴플리트는 이 말을 그대로 지켰다. ①적에게 없는 공군(폭격)과 포병(포격)을 활용해 ②서울 북쪽의 산악 지형을 방패 삼아 끝내 수도를 사수했다. 미군은 방어선에 병력을 깔아 놓기보단 화력을 중공군 진격선상에 무차별로 퍼부어 적의 막대한 손실을 강요했다. 광화문에서 마포에 이르는 길에 미군 야포 400문을 나란히 배치해, 북한산 너머 공산군을 집중적으로 포격했다.
밴틀리트의 이런 작전은 당시 국군 1군단장 백선엽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간을 내주는 대신 적이 인명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전술’이었다. 끝이 없을 것처럼 보였던 중공군의 공세는 1주일 만인 4월 29일쯤 꺾이기 시작했고,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 북쪽 6㎞ 지점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막강한 화력 앞에 맨몸 병력을 들이미는 배짱을 부렸던 중공군은 서울 북방에서만 7만5,000~8만 명이 사망하고 5만 명이 부상(‘6·26 전쟁사⑧’) 당하는 궤멸적 타격을 입고 물러났다.
“미 의회에서 미군 탄약 소비량이 문제가 되고 있었음에도, 밴플리트는 과단성 있게 포격전을 결정했다. 미군 사이에선 ‘밴플리트 탄약량(무제한 탄약 사용)’이라는 용어가 유행했다.”
(당시 국군1군단장 백선엽의 회고)

밴플리트의 공격 본능
6·25 전쟁 최대 공세를 버틴 밴플리트는 이내 반격을 통해 38선 이북으로 진격을 시도했다. 1944년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프랑스를 관통하고 라인강을 넘어 독일 심장부로 들어갔던 그의 2차대전 이력에서 볼 수 있듯이, 밴플리트는 당대 미군에서 가장 빼어난 공격형 장군 중 한 명이었다. 기동전의 대가 조지 패튼은 “내 휘하 전투 지휘관 중에서 최고였다”고 밴플리트를 평가했다.
밴플리트의 가장 대담했던 북진 계획은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과 유사한 ‘오버웰밍(압도) 작전’이었다. 원산 쪽 동해안으로 상륙하는 동시에 38선 인근에서 북진을 시도해 평양-원산 선을 단숨에 확보하는 구상이었다. 원산을 목표로 상륙작전과 공수작전을 동시에 감행하는 ‘탈롱(맹금 발톱) 작전’도 준비됐다. 밴플리트의 구상이 실현됐더라면 북위 38도선 근처에 머물던 전선을 39도선으로 단숨에 올리는 게 가능했다. 만약 한반도에서 가장 동서 거리가 좁은 평양-원산에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더라면, 긴 전쟁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얻어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이미 당시는 미국 정부가 한국에서 ‘최종 승리’ 기대를 접은 상태였다. 트루먼 행정부는 국내 반전 여론이 커지는 상황에서 매달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극동에 전력을 쏟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미군이 아시아에 주력부대를 집중한 사이, 소련의 대군이 유럽으로 치고 들어오는 시나리오도 걱정해야 했다. 그래서 미국은 공산군의 무조건 항복을 받기보다 한반도를 안정시키는 수준까지만 군사력을 투사하기로 했다. 바로 제한전(limited war) 개념이다.
결국 밴플리트가 구상한 대규모 공격 작전은 워싱턴(합참)과 도쿄(리지웨이)에서 거부당했다. 작전 목표에 제한이 거의 없었던 초기 전쟁에 비해, 이때는 이미 휴전 논의가 본격화된 시점이어서 휴전협상을 보면서 싸워야 했다. 미국 정부는 너무 공격적으로 나가면 공산 측과의 휴전 협상이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밴플리트에게 주어진 재량권은 제한적이었고, 밴플리트는 임기 내내 이런 한계를 안타까워했다.
다만 밴플리트는 자기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 중소 규모 공세 작전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피의 능선 전투(1951년 8·9월)와 단장의 능선 전투(1951년 9·10월)를 통해 양구에서 북진을 시도했고, 곧바로 코만도 작전(1951년 10월 3~12일)과 폴차지 작전(10월 15~19일)을 이어가며 서부전선을 위로 밀어 올렸다. 이후로는 대규모 기동작전 대신 백마고지, 화살머리고지, 저격능선 등에서 고지전을 이어갔다.
현재 휴전선과 과거 38선(6·25 발발 이전)을 비교하면, 월경지였던 옹진반도와 휴전협상 장소인 개성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구간에서 휴전선이 38선보다 북쪽으로 올라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이 전쟁 전보다 더 넓은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밴플리트가 꾸준하게 시도했던 여러 차례의 북진 작전 덕분이다.
“1951년 밴플리트 장군이 한국에 왔습니다. 그는 한국 청년들을 주야로 훈련시켰습니다. 이렇게 훈련받은 군대는 아시아 최강 반공군대로 한국 전선의 3분의 2 이상을 담당합니다. 한국인은 밴플리트 장군을 '국군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대통령 이승만의 1954년 미 의회 연설)

한국군의 아버지
밴플리트는 한국군의 미래를 위한 군사력 강화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밴플리트는 국군 장병 개개인의 의지는 높게 평가했으나, 조직력과 리더십 부족으로 인해 매번 중공군을 만날 때마다 주눅이 들어 패배한다고 분석했다.
해법은 ‘훈련’이었다. 그는 전쟁 와중에 전방에 야전훈련사령부를 개설하고, 국군 1개 사단씩을 통째로 넣어 장기 훈련을 실시했다. 1951년 8월 가장 처음으로 들어간 부대가 국군 9사단인데, 9사단은 이듬해 백마고지에 투입돼 중공군을 상대로 대등한 접전을 펼치면서 고지 사수에 성공했다. 장교 교육에도 힘을 보탰다. 미국 보병학교(포트 베닝)와 포병학교(포트 실)에 국군 장교 위탁 교육을 주선해, 전쟁 기간 동안 2,000여 명의 장교 및 부사관이 미국에 교육을 다녀와 국군의 동량 역할을 톡톡히 했다.
밴플리트의 업적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육군사관학교 개교다. 밴플리트는 한국군 전력 강화를 위해선 웨스트포인트(미국 육사)와 같은 정규 장교 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 한미 정부에 4년제 육사 개교를 건의했다. 그 결과가 바로 1952년 1월 진해에 들어선 육사다. 밴플리트는 육사가 현 위치(태릉)로 옮기는 과정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미 육사에 근무 중이던 사위에게 편지를 보내 △교육 과정 △훈련 내용 △조직 및 편성 등의 정보를 요청했다. 미 육사 생도들의 방한, 한국 육사 교장의 방미를 주선했다.
“저는 돌아올 것입니다. 제 마음을 돌려 달라고 여러분께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 마음은 여러분 곁에 두고 갑니다.”
(1953년 1월 30일, 밴플리트의 한국 국회 고별사)

계속된 한국 사랑
1953년 2월 60세 정년을 맞은 밴플리트가 군을 떠나야 할 시간이 왔다. 육군참모총장까지 출세 가도를 달린 그의 전임(리지웨이) 및 후임(맥스웰 테일러) 8군사령관과 달리, 밴플리트에겐 한국이 마지막 임지였다. 영전을 위해 워싱턴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던 밴플리트는 사령관 재임 22개월 동안 한국 전선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미국에 돌아가서도 한국에 군사적 지원(탄약 등)이 확대될 수 있도록 정부를 설득했고, 의회 청문회에 나가 한국군 강화 필요성을 역설했다.
냉전 초기 소련은 미국의 전쟁 의지와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전 세계 네 군데 초크 포인트(지정학적 요충지)에서 도발을 걸었다. 1946년 이란(소련의 철수 거부), 1948년 그리스(내전)와 서베를린(베를린 봉쇄), 1950년 한반도였다. 그중 밴플리트는 냉전기 자유세계에 뚫렸던 가장 큰 구멍 두 곳을 모두 틀어막는 데 성공했다.
한국 입장에서 특히 밴플리트를 기억해야 할 이유는 그가 일생 동안 보여준 한국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그리스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밴플리트는 한국전쟁이 터질 당시 이미 그리스에서 국민 영웅 대접을 받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밴플리트는 그리스 유력 정치인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리스도 유엔군 소속으로 파병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고, 실제 그리스는 한국에 1개 대대(스파르타 대대)를 보내 전쟁 내내 유엔군 소속으로 큰 활약을 했다. 유엔 참전국 중 다섯 번째 파병국이다. 공산권과의 대결에서 서방의 도움을 받은 그리스가 한국을 도와 은혜를 갚는 모습이었다.
벤플리트는 한국 부임 전엔 동아시아에 온 적도 없었지만, 2년간의 한국 근무를 마치고선 1992년 100세로 사망할 때까지 꾸준히 미국 내 친한파의 대표 인물로 활약했다. 한미 교류단체인 코리아 소사이어티 발족을 주도했고, 한국 투자를 주선하기 위해 미국의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여러 차례 방한했다. 1962년엔 전쟁 피해에서 빠르게 회복하는 한국의 발전상을 ‘한강의 기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외손자 조셉 맥크리스천의 증언을 보면 밴플리트는 생전에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밴플리트는 전투지휘관이 어때야 하는지를 보여준 완벽한 모범이다.”
(6·25 당시 미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

군생활 38년간 전 세계를 돌아다닌 밴플리트가 유독 한국을 사랑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의 외아들이 6·25 전쟁 중 공군 조종사로 복무하다가 한국 땅에서 실종됐다는 점이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아들 제임스 밴플리트 주니어(지미) 중위는 1952년 4월 B-26 폭격기를 몰고 평안도 방면 폭격에 나섰고, 밤사이 연락이 두절되어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자식을 잃는 참척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다. 그럼에도 밴플리트는 인생에서 가장 깊고 아픈 상처를 남긴 땅을 저주하지 않았고, 그 땅을 자주 찾고 그곳 사람들을 오히려 사랑하며 슬픔을 승화시켰다. 시신조차 발견하지 못한 아들의 무덤을 찾는 심정으로, 한국을 자주 방문했을지도 모르겠다. 밴플리트는 1988년 서울올림픽 때도 방한하려고 했다가, 의사가 96세 나이에 국제선 여객기를 타는 것은 무리라고 말해 계획을 접었다.
밴플리트는 언제나 한국에 진심이었다. 그 마음은 그가 한국을 떠나며 한국인들에게 남긴 메시지를 통해 여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1951년 4월 저는 우연히 미국을 떠나 한국에 오게 됐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제게 우정을 주었고, 여러분 가슴안에 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제가 시도했던 모든 것들에 따뜻한 지지를 보냈습니다. 이제 내 한국 친구들에게 안녕이라고 말할 시간이 왔습니다. 여러분들을 떠나는 것, 아직 다하지 못한 일을 남겨두고 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나라를 위해 이길 수 있고 자유를 쟁취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평화, 자유, 더 나은 삶, 큰 행복을 기원합니다.”
기사에 참고한 자료
<주요 전투 전황>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⑧
<밴플리트 일화>
-Paul F. Braim ‘The Will to Win’
-Robert Bruce ‘Tethered Eagle’
-Joseph A. McChristian, Jr. ‘Will to Win-His Greatest Legacy’
-Stephen Taaff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Lawton Collins ‘War in Peacetime’
-백선엽 ‘밴 플리트 장군과 한국군’
-백선엽 ‘군과 나’
-남정옥 ‘밴플리트 대한민국의 영원한 동반자’
-이정구 ‘밴플리트 장군의 군인정신에 관한 고찰’
<주요 인물 일화>
-Clay Blair “Forgotten War’
-Omar Bradley ‘A General’s Life’
-Stephen Taaffe ‘Marshall and His Generals’
-Forrest Pogue ‘George C. Marshall, Vol. 4: Statesman 1945~1959’
<트루먼-맥아더 갈등>
-미합동참모본부 ‘미국합동참모본부사’
-John Spanier ‘The Truman-MacArthur Controversy and the Korean War’
-Lawton Collins ‘War in Peacetime’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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