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장군 얼굴 다시 걸렸다, 美 이념전쟁 재점화

뉴욕/윤주헌 특파원 2025. 9. 4.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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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도서관에 초상화 복원
로버트 리 장군 초상화가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다시 걸렸다./미 스미소니언 국립 초상화 미술관

미국 남북전쟁(1861~1865)에서 노예제를 지지하는 남부연합군을 이끌었던 로버트 리(1807~1870) 장군의 대형 초상화가 모교인 뉴욕주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 도서관에 다시 내걸렸다고 AP통신이 미 육군을 인용해 2일 보도했다.

민주당 조 바이든 정부 시절인 2022년 12월 ‘인종차별 논란에 있는 인물을 기념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철거된 지 3년 9개월 만에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웨스트포인트는 같은 이유로 치워졌던 캠퍼스 내 흉상도 복원하고 리를 따서 명명했다 이름을 교체한 학내 시설물 이름도 순차적으로 원상복귀시킬 예정이다.

이번 결정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3월 서명한 ‘미국 역사 바로 세우기’ 행정명령에 따른 후속 조치다. 행정명령의 골자는 “2020년 이후 철거되거나 명칭이 변경된 기념물, 동상, 표지 등이 ‘역사 왜곡’이라고 판단되면 복원하라”는 것이다. 이는 전임 민주당 조 바이든 대통령 시절 흑백 인종차별과 연관된 역사 유적이나 시설물의 지명을 바꾼 것을 전면 백지화하는 내용이다.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과거 인물에 대한 판단이 180도 바뀌는 상황에 미국 정치·사회의 분열상이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2021년 9월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 세워졌던 로버트 리의 동상이 철거되는 모습. /AP 연합뉴스

이번에 다시 걸린 초상화는 화가 시드니 디킨슨의 작품으로, 리는 회색 남부군 제복을 입고 서 있고, 흑인 남성이 말을 끄는 장면을 그렸다. 1952년 1월 리의 생일에 맞춰 웨스트포인트 도서관에 걸렸다.

리 기념물에 대한 존폐 논란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1기 첫해였던 2017년 5월이다. 버지니아주 샬러츠빌 시의회가 인종차별 유산이라는 이유로 리 동상을 철거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철거 찬성론자들 사이에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 이후 2020년 5월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촉발된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 시위는 논란의 기폭제가 됐다.

BLM 시위를 계기로 남북전쟁 시기 남부연합 관련 인물과 기념물을 철거하고 그들을 따서 명명한 건물·도로명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진보 진영과 유색인종 민권 단체를 중심으로 제기됐다. 이들의 지지를 받으며 2021년 1월 출범한 조 바이든 행정부는 이 같은 요구를 실행에 옮겼다. 남북전쟁에서 노예제 폐지를 옹호하는 북군과 맞섰던 남군을 이끈 리도 표적이 됐다. 웨스트포인트 도서관에 걸린 그의 초상화에 대해 ‘남군 사령관이 탄 말을 흑인 노예가 끌고 가는 모습은 명백한 인종차별적 시각’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2022년 10월 연방 의회가 남부연합군 관련 시설물을 없애는 것이 적합하다고 웨스트포인트에 권고했고, 이 조치에 따라 리의 초상화와 흉상이 창고로 옮겨졌다. 리의 이름을 딴 교내 막사·도로·문도 모두 개명됐다.

2023년에는 리의 이름을 딴 군 기지 ‘포트 리’가 2차 대전에서 활약한 흑인 남녀 군인 아서 그레그 중장과 채러티 애덤스 얼리 중령의 이름을 딴 ‘포트 그레그-애덤스 기지’로 개명됐다. 민주당 소속 랠프 노덤 주지사가 재임하던 2021년에는 버지니아주 주도 리치먼드에 설치됐던 리의 동상도 철거됐다.

이런 조치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다. 공화당 등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미국 역사를 특정 이념으로 재단·왜곡하려 한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특히 이름을 바꾸거나 지우는 집중 타깃이 된 인물이 리라는 점에 대한 논란도 적지 않았다. 그가 백인우월주의자들 사이에선 신격화된 측면도 있지만, 탁월한 전략과 빼어난 인품을 갖춘 모범 군인이며 전후 국가 통합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라는 평가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리는 열일곱 살에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해 엘리트 장교로 두각을 나타냈고, 남북전쟁 전에는 육사 교장을 맡아 후배 장교들을 양성했다. 남북전쟁 발발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인품과 지략으로 이름난 리에게 북부연합군 사령관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지만, 남부연합 소속 버지니아 출신인 그는 링컨의 제의를 거절하고 남부연합군 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훗날 미국 18대 대통령이 되는 율리시스 그랜트가 이끄는 북부연합군에 항복한 뒤 휘하 장병들에게 패배가 자신의 책임임을 강조하고, 각자 귀향해 국가 통합에 힘써달라고 당부했다.

트럼프 정부의 기조에 따라 바이든 정부 때 사라졌던 남부군 관련 명칭은 속속 예전 이름을 찾고 있다. 지난 2월 피트 헤그세스 국방부 장관은 노스캐롤라이나의 군 기지 ‘포트 리버티’를 예전 이름인 ‘포트 브래그’로 바꿨다. 포트 브래그는 남부군 장교 브랙스턴 브래그에서 이름을 따왔다 바이든 행정부에서 개명됐던 곳이다. 국방부는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 내에 있던 남부연합 기념물을 2027년까지 복원하겠다고 밝혔고, 워싱턴 DC에 남부연합 장군 동상도 재설치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원상 복구 움직임이 또 다른 이념·인종 갈등을 유발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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