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단] 수원의 농촌진흥청 서사

윤인수 2025. 9. 3.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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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水原)은 한자 지명 그대로 물의 도시다. 삼한시대의 모수국(牟水國), 삼국시대의 매홀(買忽·물골), 고려시대의 수성(水城), 수주(水州)가 조선의 수원으로 현재에 이른다. 정조의 수원 ‘화성’ 신도시 건설도 마르지 않는 물로 비옥한 토지 덕분에 가능했다. 화성의 자족을 위해 축조한 축만제, 서호는 수원시 농업 서사의 원천이다.

1905년 을사늑약에 따라 한성에 입성한 일제 통감부도 ‘오곡이 풍성한 반도 중앙부의 대보고(수원시사)’인 수원을 주목했다. 1906년 권업모범장을, 1907년에 농림학교를 수원에 세웠다. 강제합방 이후 권업모범장은 농업시험장으로, 농림학교는 수원농림전문학교로 명칭도 기능도 격상됐다. 수원을 식민 농업의 본산으로 삼아 반도 농산물 수탈의 질과 양을 높인 것이다.

‘수원 서울 농대’가 가능했던 건 해방 직후 수원농림전문학교가 서울대 농대가 된 덕분이다. 농업시험장은 수차례의 개칭을 거쳐 1962년 현재의 농촌진흥청 간판을 달았다. 수원의 두 국가기관은 해방 조국과 국민의 식량문제 해결에 헌신했다. 농진청의 활약이 눈부셨다. 정부의 읍소로 귀국한 우장춘 박사는 한국농업과학연구소를 설립해 한국형 종자개량에 매진했다. 농진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의 전신이다. 1970년대에 통일벼 종자로 녹색혁명을 주도한 것도 농진청이다. 수원은 대한민국 농업의 본산으로 나라의 산업화를 단단하게 지지했다.

명성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았다. 2003년 서울 농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빈터에 경기문화재단이 상상캠퍼스를 운영한다. 2015년엔 농진청이 통째로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했다. 수원시가 아쉬워 빈자리에 농업역사문화전시체험관을 설립하고 나서자 정부가 이를 격상시켜 2022년 국립농업박물관을 개관했다. 수원에 깃든 한국 농업의 서사를 외면할 수 없었을 테다.

수원 구 농진청 터에 농진청 산하 국립식량과학원 중부작물연구소가 잔류했었다. 농진청이 중부작물연구소를 개편해 완주 본원에 옮기는 대신 2개과를 수원으로 옮기기로 했다가 전북 지역 정치권과 언론에 된서리를 맞았다. 정부의 공공기관 이전 정책으로 수원은 도시의 정체성과 역사적 서사를 잃었다. 그럼에도 수원에서 농진청의 흔적을 말살하려는 전북 정치권과 언론의 행태가 악착같으니, 정나미가 떨어진다. 농진청은 껍데기만 갔다. 지역에서도 그것만 원한 것 같고.

/윤인수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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