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돋보기] 느린학습자 정책개선, 이제는 선택이 아닌 필수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교육 기회의 확대와 포용적 복지 실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무상급식, 무상교육, 장애인 지원 확대, 다문화 정책 등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러나 여전히 제도적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서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고 있다. 바로 '느린학습자(경계선지능인)'들이다.
경계선지능인은 일반적으로 지능지수(IQ) 71~84 구간에 속하는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장애인으로 분류되지 않지만, 학업과 사회적응, 취업과 자립의 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학교에서는 일반 학생들과 동일한 교과 과정을 따라가야 하지만 속도나 이해력이 상대적으로 느려 성취감보다는 실패 경험을 쌓게 되고, 이는 낮은 자존감과 학업 중단으로 이어지기 쉽다. 동시에 법적 장애인에 해당하지 않아 장애인복지 제도의 지원에서도 배제되고 있다. 결국 제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보이지 않는 이웃'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느린학습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성장 전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습 지연과 또래 관계의 어려움이 시작되고, 청소년기에는 진로 탐색의 기회 부족과 왕따·학교폭력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성인이 되어서는 학업이나 기술 습득의 기회 부족, 맞춤형 직업훈련의 부재로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기 어렵다. 이로 인해 경제적 자립은 물론 사회적 소속감 형성이 힘들어지고, 가족에게도 과중한 돌봄 부담이 전가된다.
문제는 이들의 어려움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산된다는 점이다. 사회적 지지가 부족한 느린학습자는 빈곤과 실업, 고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며, 이로 인해 복지 의존도가 높아져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고 있다. OECD 연구에 따르면 학습 부진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조기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장기적으로 실업급여, 기초생활보장 등 복지비용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범죄율도 높아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정책의 전환과 적극적인 행정적 개입이 절실하다.
첫째, 공교육 안에서 맞춤형 학습지원 체계를 제도화해야 한다. 느린학습자의 조기 발굴을 위한 체계적인 검사와 진단이 필요하며, 보충 학습, 개별화 교육, 정서 상담이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 단순히 학업 성취를 따라잡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효능감과 자존감을 키워주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둘째, 교사와 학부모가 느린학습자의 특성을 이해하고 지원할 수 있도록 전문 인력 양성과 상담 지원이 필요하다. 현재 교사 양성과정에서는 경계선지능인 교육에 대한 내용이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교실에서 학습이 더딘 아이를 어떻게 지원할지 몰라 방치하거나 낙인찍는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정책은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학부모 역시 체계적인 상담과 교육을 통해 자녀의 특성을 이해하고 올바른 양육 방법을 익혀야 한다.
셋째, 졸업 후에도 지속적인 직업·진로 지원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청년 및 중장년 느린학습자에게는 직업 기초교육, 현장 인턴십, 사회적기업 및 공공기관과의 연계 프로그램 등이 필요하다. 단순한 직무교육이 아니라, 실제로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훈련–실습–고용'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갖춰져야 한다.
또한 복지 영역 역시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느린학습자의 삶은 교육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주거, 문화, 여가, 돌봄, 가족 지원 등과 연결되어 있다. 지역 내에서 사례관리 체계와 보호망을 구축하고, 가족의 부담을 덜어줄 서비스가 함께 제공되어야 한다. 특히 중장년 느린학습자의 경우 청소년·청년기에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성인이 된 분들이 많아, 복지 사각지대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다. 이들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시급하다.
경기도는 이미 다양한 교육·복지 정책을 통해 전국적 선도 역할을 해 왔다. 이제는 느린학습자 정책에서도 선제적이고 체계적인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경기도 차원에서 느린학습자 평생교육지원센터 설치, 직업훈련 및 학습공간 마련, 멘토링과 사회인식 개선 캠페인을 추진한다면, 이는 곧 전국 확산의 기폭제가 될 것이다.
경계선지능인 지원은 단순히 한 집단을 돕는 복지가 아니다. 사회 전체의 통합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투자다. 느린학습자들이 자립 역량을 키우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의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공동체의 품격을 높이는 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느린학습자들이 제도적 공백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이제는 이들을 위한 정책 개선이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느린학습자가 차별과 소외 없이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그것이 곧 경기도와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포용사회의 모습이다.
김동희 경기도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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