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대통령의 영어, 국가의 운명을 바꾸는 무기

1995년 덴마크 코펜하겐. 110여 개국 정상들이 몰려든 '유엔 사회개발정상회의'는 도심 전체를 마비시켰다.
호텔 로비와 회의장 복도는 국가이익을 건 눈치싸움으로 소란스러웠다. 각 정상들은 매우 분주히 움직였다. 이들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누구와 손을 잡고 누구를 견제할 것인가.
외교는 겉보기엔 의전과 미소로 가득하지만, 실제로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전쟁터다. 공식 회의에서 오가는 발언은 대개 예정된 원고에 불과하다.
진짜 외교는 그 앞뒤의 짧은 농담, 회의장 밖 복도에서 건네는 한마디, 만찬 자리에서 오간 웃음 속에서 이뤄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순간을 지배하는 무기가 따로 있다는 점이다.
바로 영어다. 통역은 의미를 옮겨 주지만 감정은 옮기지 못한다. 지도자가 농담을 던지고 상대방이 바로 웃을 때 비로소 신뢰가 시작된다. 그러나 통역이 개입하는 순간, 웃음은 반 박자 늦는다.
이미 분위기가 넘어간 뒤 홀로 따라 웃는 대통령의 모습은 자칫 국격의 민망함으로 비칠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중요한 제안이나 합의가 '번역 지연' 속에 이미 흘러가 버린다는 사실이다.
외교의 세계에서 한 템포 늦음은 곧 국익의 후퇴다.
역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1980년대 냉전 막바지, 레이건 대통령의 "trust, but verify(믿되 검증하라)"는 표현은 통역을 거치며 고르바초프에게 처음엔 불신과 모욕으로 전달됐다. 뒤늦게 의미가 풀리면서 웃어넘길 수 있었지만, 그 잠깐의 오해가 양국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사죄'와 '배상'의 표현 차이가 제대로 조율되지 않아 불필요한 외교 갈등을 낳기도 했다. 언어는 총보다 날카롭게 국익을 흔드는 법이다.
반대로, 영어가 직접 통했을 때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클린턴과 블레어는 영어라는 공통 언어 위에서 '브로맨스' 수준의 관계를 유지하며 북아일랜드 평화 협정 같은 난제를 풀었다. 오바마와 메르켈 역시 통역을 거치지 않고 잡담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신뢰를 다졌다. 회고록 속 오바마의 표현이 상징적이다. "메르켈과는 통역이 필요 없었다. 그래서 위기를 훨씬 빨리 풀 수 있었다."
최근 사례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와 사우디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두 사람은 국제사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가까웠다. 트럼프 특유의 직설적 영어와 빈 살만의 거침없는 화법은 언론에선 "위험한 동맹"이라 불렸지만, 적어도 두 사람 사이에서는 '언어가 통한' 덕분에 협력의 끈이 쉽게 이어졌다.
외교적 접착제는 군사력도, 석유도 아닌 결국 언어였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외교 무대 모습은 어떤가.
다자회담 등 대부분 공식 회의장에서는 통역 이어폰을 착용한다. 양자 회담이나 만찬 등의 일정에는 통역의 도움을 받는다. 물론 국위와 국격을 고려하여 통역을 일부러(?) 대동하기도 한다.
또한 문화적 배경과 역사적 차이를 고려하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 늘 반 템포 늦게 반응하는 모습은 국제정치의 속도전에선 아쉬움으로 남는다. 특히 기술, 안보, 기후, 반도체 패권 같은 의제가 순식간에 바뀌는 지금, 느린 대응은 곧 기회의 상실로 직결된다.
영어가 지도자의 모든 자질을 가늠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21세기 외교의 최전선에서는 영어가 선택이 아니라 생존 수단이다.
통역은 필요하지만, 반 박자 더딘 통역으로는 우정을 만들 수 없고 신뢰를 단숨에 쌓을 수 없다.
웃음도, 위로도, 설득도 결국은 언어의 즉시성이 생명이다.
영어 한 문장을 직접 던지는 것은 단순한 소통이 아니다.
그것은 총성 없는 전장에서 날아가는 '설득의 탄환'이다.
대통령의 영어는 교양이 아니라 무기이며, 때로는 국가의 운명을 앞당기는 결정적 트리거다.
정상들도 인간인지라 떡 하나 더 주고 싶은 사람이 있고, 괜히 미운 사람도 있다.
그 사적감정이 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기도 한다.
외교의 본질도 결국 인간관계다. 그리고 인간관계의 본질은 공감에 있다.
서로 맞장구를 쳐주고, 서로 아픔을 나눌 때 개인적 친밀감은 국가간 신뢰와 이익으로 연결된다.
한번 만났다고 뭔 신뢰가 쌓이겠는가?
긴 시간을 마주한들 통역이 끼면 나의 발언은 1/4에 불과하다.
통역을 기다리며 늦게 웃는 대통령보다, 농담을 곧바로 받아치는 대통령이 훨씬 유리하다.
국제정치의 냉혹한 무대에서 영어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국가의 운명이 달린 무기다.
정상환 The Brain & Action Communicator, 한경국립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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