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로 돌아온 배우 이항나 “나이 오십 되니 체호프가 찾아왔어요”

임석규 기자 2025. 9. 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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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몰입형 연극 ‘바냐 아저씨’ 13~17일 TINC에서
러시아 연극 유학파 1호로 꼽히는 배우 이항나가 본업인 연출가로 돌아와 체호프 연극 ‘바냐 아저씨’를 무대에 올린다. 더룸욕망극장 제공

“(매체 연기자로서는) 주어진 역할만 하는 수동적 위치잖아요. 상업적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연극을 하고 싶어요.”

영화·드라마에서 낯익은 배우 이항나(55)가 본업인 연극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연기가 아니라 연출. 러시아 작가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를 특별한 형식으로 무대에 올린다. 최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만난 이항나는 “제겐 연극이 원천기술이나 마찬가지”라며 웃었다.

공연장부터 독특하다. 과거 교회였던 서울 성북구 삼선동 전시 공간 ‘티아이엔시’(TINC)인데, 별도 무대가 없다. 배우들이 의자에 앉은 관객들 사이로 오가며 연기한다. 지난달 27일 대학로 연습실 현장에서도 바로 코앞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표정을 세밀하게 살필 수 있었다. 조용한 독백도, 속삭이는 대사도 선명하게 들린다. ‘목 매달기 좋은 날씨’란 바냐의 유명한 대사가 유독 귀에 꽂힌다. 19세기 러시아의 권태롭고 무기력한 일상에서 체념하고 자조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들어온다.

배우 이항나가 10년 만에 연출가로 나선 체호프 연극 ‘바냐 아저씨’는 일몰의 햇빛을 자연 채광으로 활용한다. 더룸욕망극장 제공

자연 채광을 활용한다는 점도 이채롭다. 일몰의 햇살이 공연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창문을 열어둔 채로 연극을 시작한다. 공연 시작 시간도 오후 6시30분으로 앞당긴다. 1막이 끝나고 어둑해질 무렵에야 블라인드를 내린다. 이항나 연출은 “일종의 관객 몰입형 이머시브 공연”이라며 “관객이 편안하게 보시면서 새로운 공연 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항나는 러시아 연극 유학파 1호로 꼽힌다. 소련 수교 이듬해인 1991년 동국대 연극영화과 졸업 동기인 박신양 등과 함께 러시아 쉐프킨 연극대로 유학했다. 그가 1993년 러시아에서 창단한 극단 ‘떼아뜨르 노리’는 2012년까지 국내에서 꾸준히 작품을 올렸다. 이후 무대와 매체 연기를 넘나들었고, 간간이 연출도 했다. 배우 송강호의 아내로 열연한 영화 ‘변호인’(2013)은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10년 정도 영화·드라마에서 전력 질주했더니 ‘내가 어디에 와 있나’,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원래 영상 배우는 그의 꿈이 아니었다. 자신을 포함해 연기자들의 무대에 대한 갈증과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싶었다. 지난해 10월, 비슷한 욕망을 지닌 배우들과 모임을 시작했다. 아예 비상설 프로젝트 극단을 만들고, ‘더룸 욕망극장’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김도연, 우연서 등 경기대 전임교수 시절 인연을 맺은 제자들도 찾아왔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69번 참가자’를 연기한 배우 김윤태도 출연한다.

배우 이항나가 연출하는 체호프 연극 ‘바냐 아저씨’는 별도 무대 없이 배우들이 관객들이 앉은 의자 사이를 오가며 연기한다. 더룸욕망극장 제공

첫 작품은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작품이어야 했다. 자연스럽게 체호프를 선택했고, ‘바냐 아저씨’로 뜻이 모였다. “어차피 삶은 유한하며, 죽는 날까지 고통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는 걸 바냐가 깨달아 가는 작품이잖아요.” 그는 “나이 오십을 넘기면서 이런 얘기를 해보고 싶어진 모양”이라고 했다. 그의 설명을 듣다 보니 이 작품에 나오는 소냐의 대사가 떠오른다. “바냐 아저씨, 우리는 살아갈 거예요. 길고 긴 낮과 밤들을 살아갈 거예요. (…) 그러다 언젠가 우리의 때가 닥치면 불평 없이 죽어갈 거예요. 그리고 우리 무덤 위에서 이렇게 말하겠지요. 우리는 고통을 겪었고, 눈물을 흘렸고, 괴로워했노라고.”

이항나에게 이머시브 연극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7년 ‘그녀의 방’ 시리즈에서 이미 관객 참여형 형식을 실험했다. 그가 월세방에 살면서 겪은 이야기를 대본으로 쓰고 연출까지 한 작품이다. 관객이 6개의 방을 돌아다니면서 연극을 관람하는 형식이었는데, 관객 반응은 기대 이하였다. “이젠 실험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는 “시대가 변했으니 공연이 새로운 형태로 진화해야 한다”면서도 “관객이 불편해 하지 않고 신선하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이면 된다”고 했다. 내년엔 학교 폭력을 다룬 2인극 ‘말벌’을 연출한다. 공연은 13일부터 17일까지.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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