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전문운용사 설립, 전략적 선택은

기호일보 2025. 9. 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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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 이음연구소장·경영학 박사
김성일 이음연구소장

퇴직연금 시장의 '게임의 룰'이 바뀌고 있다. 지난 7월 22일 안도걸 의원이 대표발의한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일부개정법률안'은 단순한 법 조항의 개정을 넘어 시장의 패러다임을 '판매와 관리'에서 '성과와 운용'으로 전환하는 거대한 지각변동을 예고한다. 이 변화의 폭풍 속에서 기존의 안일한 관행에 머무르는 사업자는 도태될 것이며, 변화를 기회로 인식하고 선제적으로 행동하는 사업자만이 미래 시장의 주도권을 쥘 것이다.

변화의 핵심은 '퇴직연금기금 전문운용사' 등장이다. 그리고 모든 퇴직연금사업자 앞에 놓인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전략적 과제는 바로 이 전문운용사를 '어떻게' 설립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법안은 사업자들에게 세 가지의 명확하고도 각기 다른 길을 제시한다. 이는 단순히 조직을 만드는 방법을 넘어 각 사의 정체성과 미래 전략을 결정하는 중대한 갈림길이다. 이제 각 금융기관은 이 세 갈래 길 앞에서 자사의 강점과 약점 그리고 시장에서의 포지셔닝을 냉철하게 분석해 최적의 경로를 선택해야만 한다.

# 첫 번째 길:단독 설립, '홀로서기'의 명과 암 

가장 직설적이고 강력한 방법은 개별 퇴직연금사업자가 100% 자회사 형태의 전문운용사를 직접 설립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대규모 자본과 명확한 비전을 가진 사업자에게 매력적인 선택지다. 이 경로의 가장 큰 장점은 '완벽한 통제권'이다. 운용 철학의 수립부터 투자 전략의 결정, 핵심 인력의 영입과 상품 개발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사결정을 독자적이고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다.

이는 시장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고 자사만의 차별화된 운용 색깔을 분명히 해 강력한 브랜드를 구축하는 데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성과가 좋을 경우 운용보수를 포함한 모든 과실을 독점할 수 있다는 점 또한 매력적인 요소다.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 사업자에게는 가장 확실한 보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길은 막대한 초기 투자 비용이 부담이다. 최고 수준의 펀드매니저와 애널리스트, 리스크 관리 전문가를 영입하고 고도화된 운용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에는 상당한 규모의 자본 투자가 필수적이다. 또 운용 실패 시 발생하는 모든 금전적 손실과 시장의 비판을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집중된 리스크를 안게 된다. 이는 마치 모든 것을 걸고 벌이는 '올인(All-in)' 베팅과도 같다.

# 두 번째 길:공동 설립, '동맹'의 시너지와 딜레마

단독으로 거대한 파도를 넘기 어렵다면 여러 척의 배가 힘을 합쳐 선단을 꾸리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 수 있다. 법안이 제시하는 '공동 설립'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둘 이상의 퇴직연금사업자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하나의 전문운용사를 만드는 모델이다. 예컨대 운용 역량은 있지만 고객 기반이 약한 중소형 증권사와 고객 기반은 탄탄하지만 운용 경험이 부족한 지방은행이 손을 잡는 식의 협력이 가능하다.

이 '동맹 전략'의 가장 큰 미덕은 비용과 리스크의 분산이다. 막대한 초기 설립 비용과 운영 리스크를 참여사들이 함께 나눠 짊어짐으로써 각 사의 재무적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나아가 각자의 강점을 결합해 강력한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동맹에는 언제나 갈등의 씨앗이 내재돼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복잡하고 더딘 의사결정 구조다.

각 참여사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할 경우 투자 전략 수립이나 위기 대응과 같은 중요한 의사결정이 지연되거나 최선이 아닌 차선의 합의에 그칠 수 있다. "배가 많으면 사공이 산으로 간다"는 속담이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성과가 발생했을 때 그 수익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잠재적 갈등 요인이다.

# 세 번째 길:겸업 허가, '가장 빠른 길'의 기회와 함정

마지막 길은 이미 닦여 있는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과 같다. 법안은 퇴직연금사업자가 이미 보유한 자산운용 자회사와 같은 금융투자업자에게 고용노동부의 허가를 받아 전문운용사 역할을 겸하게 하는 방식을 허용한다.

이 방식의 최대 장점은 단연 속도와 효율성이다. 새로운 법인을 설립하고 인력을 충원하는 복잡한 과정을 생략하고 기존의 조직과 시스템 그리고 검증된 인력을 즉시 활용할 수 있다. 이는 변화하는 시장에 가장 빠르게 진입해 선점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다. 특히 이미 시장에서 우수한 트랙 레코드를 쌓아 온 자산운용사의 노하우와 평판을 퇴직연금 운용에 곧바로 접목할 수 있다는 점은 강력한 무기가 된다.

하지만 가장 빠른 길에는 그만큼 위험한 함정이 숨어 있다. 바로 '이해 상충'과 '독립성'의 문제다. 모회사인 퇴직연금사업자의 영향력에서 자회사가 얼마나 독립적인 운용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시장의 의구심은 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모회사에 유리한 상품을 기금에 편입하거나 그룹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가입자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상상 이상으로 엄격하고 투명한 내부 통제 시스템과 독립적인 거버넌스 구축이 선행돼야 한다.

결론적으로 퇴직연금 전문운용사 설립의 세 갈래 길에는 정답이 없다. 각자의 체력과 전략 그리고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최적의 경로는 달라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선택이 향후 10년, 20년의 퇴직연금 시장에서 자사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변곡점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책상 위 법안을 넘어 시장의 미래를 내다보는 깊은 통찰과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때다. 선택의 시간은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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