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 변호하던 변호사, 성폭력 피해자가 되다
연극 '프리마 파시'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무대에는 육중한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 뒤로 크고 견고한 문이 굳게 닫혀 있다. 고압적이면서 안정적인 이 테이블은 주로 죄의 유무를 다루는 법정을 상징한다. 주인공 테사(김신록)는 변호사다. 법복을 걸치고 노란 곱슬거리는 가발을 쓴 그는 상처 입은 먹이를 노리는 승냥이처럼 허점을 파고들 타이밍을 노린다. 법이라는 규율 안에서 그는 증언자를 교묘히 몰아 법의 올가미로 가둔다.
노동자 출신인 테사는 상류층 학생들과 경쟁하며 치열하게 변호사 자리를 얻었다. 그는 법적 진리를 믿으며 뛰어난 논리와 전략으로 검사에 맞서 무죄를 이끌어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성폭력 피해자조차 가차 없이 몰아세운다. 친구는 성폭력범들의 변호가 테사에게 자주 주어지는 데 대해 "여성이기 때문에 유리하니까, 그걸 이용하는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냐"고 묻는다. 그러나 테사는 그것은 그저 규칙일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연극 '프리마 파시'는 성폭력 가해자의 변호인이었던 테사가 성폭력 피해자가 되면서 신뢰하던 법의 모순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다. '프리마 파시(Prima Facie)'는 '일단 증거가 제시되면 그것을 사실로 간주한다'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법률 용어다. 테사가 굳게 믿었던, 실질적 진실보다 우선하는 법적 진실을 뜻한다.
유능한 변호사였던 테사는 장래가 촉망받는 동료 변호사 줄리언에게 호감을 가졌고 술자리 후 집으로 데려와 사랑을 나누려 했다. 그러나 거부 의사에도 줄리언은 강제로 관계를 맺었다. 테사는 혼란 속에서 법조인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들을 한다.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스스로 치우고 불필요한 말을 늘어놓는다. 피해자들을 법정에서 몰아세울 때 지적했던 약점을 자신이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는 그제야 성폭력 피해자들의 절망을 몸소 이해한다.

김신록 홀로 이끌어낸 140분

법적으로 모든 정황이 줄리언의 무죄를 가리킨다. 유능한 변호사인 테사는 누구보다도 정확히 어떤 판결이 내려질지 안다. 그럼에도 그는 재판을 택한다. 경찰에 신고하고 실제 판결이 이루어지기까지 2년여의 지옥 같은 시간이 흘렀다. 테사는 경력과 평판, 삶을 잃었다. 재판 과정에서 테사는 나약하고 무력했으며 노련한 변호사가 유도한 대로 몰리고 올가미로 뛰어들었다. 그런 테사가 이미 정해진 결말을 알면서도 법정에서 싸웠던 이유는 어머니와 그의 팔을 잡아준 어린 여경 때문이다. 자신을 믿어주는 이와 미래의 피해자들을 위해 법의 모순과 싸운다. 법이 진화할 것을 믿으며 작은 파문을 내려 한다.
재판 과정 내내 몰리던 테사는 정신을 가다듬고 법적 진술이 아닌, 진실에 호소하는 실질적 진술을 한다. 상대 변호사는 '브와 디르(voir dire)'를 요청한다. 이는 선입견을 주지 않기 위해 법적으로 효력이 없는 진술을 할 때 배심원단을 내보내 달라고 요청하는 절차다. 모순적이게도 '브와 디르'의 불어 어원은 '진실을 말하다'다. 테사는 판사의 만류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이어간다. 판결은 예상대로 패배로 끝나지만 이는 시작일 뿐이다. 테사는 마지막 보루인 법이 실질적 진실에 귀 기울이고 이를 반영할 수 있도록 법의 진화를 요구하는 싸움을 이어간다. 긴 재판 과정을 마친 테사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육중한 문을 열고 퇴장하며 극은 마무리된다.
작가 수지 밀러는 인권변호사이자 형사법 전공자로서, 성폭력 피해자가 법정에서 범죄 입증의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부당한 현실을 1인극으로 풀어냈다. 이자람, 차지연과 함께 캐스팅된 이날의 테사 김신록은 자만심에 찬 거만한 변호사에서 혼란스러운 피해자, 법의 진화를 요구하는 투사로 변모하는 과정을 다이내믹하게 연기했다. 동시에 어머니, 동료 변호사, 경찰, 우버 기사 등 수십 개의 인물을 오가며 긴장감 넘치게 극을 이끌어 갔다. 지적이면서도 강렬하고 본능적인 김신록의 연기 매력이 140분간 폭발했다. 연극 '프리마 파시'는 11월 2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된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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