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금 털어 산 백자가 시작… 수집귀신에 홀린 병, 죽어야 끝날걸요”[M 인터뷰]
고교때 수석 모으며 미감에 눈떠
호텔 경영하며 본격 수집가 길로
1999년부터 로비에 전시실 꾸며
한국 경매 최고가 청화백자부터
김환기 등 근현대작가 회화까지
30년 모은작품 기획전으로 선봬
사연깃든 미술품 감동도 다 달라
끌림 없이 유행따라 구매는 금물

여인의 둔부를 그린 듯한 반추상화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김환기(1913∼1974) 선생이 아내 김향안 여사를 그린 거예요. 희귀작이죠.”
김환기 작품에 이런 게 있다고? 눈이 확 떠졌다.
그가 다음 그림 앞에서 걸음을 또 멈췄다. ‘Le Ciel’(하늘)이란 제목의 작품. 파란 색감이 매혹적이다. 이른바 ‘환기 블루’로 불리는 그것이다.
“이 작품 주제는 노스탤지어예요. 이혼한 후 세 딸을 두고 프랑스 파리에 갔을 때 그린 것이지요. 고국의 딸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림 내면을 살피면 눈물이 납니다.”
이상준(69) 더 프리마 회장은 이렇게 말하며 수집 비화를 귀띔했다. “처음에 1억2000만 원을 주고 샀다가 옥션 경매를 통해 3억5000만 원에 팔았어요. 그런데 작품이 눈앞에 계속 어른거려서 5억 원에 되샀지요, 하하.”
프리마호텔을 경영해 온 이 회장은 미술품 컬렉터로도 문화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최근 그를 두 번 만났는데, 그때마다 뮤지엄 큐레이터처럼 수집 작품에 깃든 사연들을 들려주기 위해 애썼다. 코로나19 기간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회복 중이어서 아직 말이 어눌한데도 그랬다. 미술품 앞에 서면 마음이 절로 들썽거리는 듯했다.
“작품마다 사연이 깃들어 있어 감동이 모두 다릅니다. 그걸 많은 분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늘 했지요.”
1999년부터 청담 프리마호텔을 운영하며 그 내부에 작은 전시실을 꾸민 것은 그래서였다. 근·현대 작가 21인전, 테마별 도자기전 등을 펼침으로써 ‘아트 경영’의 모델로 평가받았다. 작년에 종로구 조계사 앞으로 호텔을 옮겨서도 로비와 객실 등에 미술품 200여 점을 비치했다.
그는 이에 머물지 않고 아예 뮤지엄을 설립했다. 호텔 인근 인사동길에 지난달 26일 개관한 ‘더 프리마 아트 센터’.
뮤지엄은 그의 오랜 꿈이었다. 자신이 수십 년 동안 수집한 작품들을 많은 이들에게 잘 선보이는 게 소명이라고 여겨서였다.
“호텔과 아트 센터 사이에 누각이 하나 있는 걸 보셨지요? 그 누각 현판은 오세창 선생 글씨입니다. 전서(篆書)로 ‘棲眞養性(서진양성)’이라고 쓰여 있지요. ‘참된 진리가 깃들어 성품을 기른다’는 뜻입니다. 저희 아트 센터의 소망이 담겨 있는 듯싶습니다.”
아트 센터는 지하 2층∼지상 4층 규모로 4개의 전시실, 아카데미실, 뮤지엄 숍을 갖췄다. 전시실에선 우리 옛 도자기부터 현대미술까지 아우르는 기획전을 다채롭게 펼칠 예정이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개관전 3개는 그 지향을 품고 있다.

우선 ‘근현대회화 블루칩 작가전’은 한국 미술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화가들의 작품들을 보여준다.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천경자, 김창열 등 작고 거장부터 이우환, 이숙자 등 원로들의 희귀작을 만날 수 있다. 이배, 우원국, 이목을, 오치균, 황재형 등 활발히 활동해 온 중진들의 작품도 함께 자리했다.
“저기 강요배 작가의 작품은 제주 풍경을 그렸잖아요. 저 바람과 폭포 소리가 들리세요?”
자신의 감탄을 담은 질문은 역시 개관전의 하나인 ‘명품도자전’에서도 이어졌다. 그는 전시장 앞에 자리한 석조상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고려시대에 상상의 동물 기린을 조각한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의 미감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악귀를 쫓는 좋은 기운이 여기서 느껴지세요?”
이 전시는 그가 한 점 한 점 모아온 도자기 명품 300여 점을 선보인다. 그는 지난 30여 년 동안 고미술품을 수집하며 우리 도자기의 질박하면서도 그윽한 맛에 푹 빠졌다고 했다.
“저 청자를 보세요. 1300년 전 유물이 저리 빛을 냅니다.”
그의 말에 사랑과 자랑이 섞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조선시대 유물인 분청사기 덤벙 앞에서 걸음을 한참 멈췄다.
“우리는 이걸 막사발이라고 불렀지요. 일본인들은 신이 만든 것이라며 극찬했어요. 여기에 술을 뜨겁게 데워 부으면 따뜻하고, 조금 있으면 식어가면서 체온과 비슷한 온도를 유지합니다. 모양이 참 소박하지만, 두 손에 잡히는 그 감각이 환상적이지요.”
이번 전시엔 간송 컬렉션인 동자상도 나와 있다. 그는 “경매에 나온 것을 우여곡절 끝에 매입했다”며 “참으로 귀한 우리 문화유산이어서 소중히 모시고 있다”고 했다.

그는 ‘백자청화운룡문호(白瓷靑畵雲龍紋壺)’를 바라보면서 홀린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유물엔 우리 조상들의 혼백이 들어 있지요.”
높이가 56㎝인 이 청화백자는 조선 왕실의 연례와 제례에서 쓰인 용준(龍樽)이다. 오조쌍용준(五爪雙龍樽)이라고도 불리는데, 발톱이 다섯 개인 오조룡은 황제국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영조 연간에 왕명으로 제작함으로써 나라 안팎에 권위와 위엄을 과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 크기의 대형 용준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 리움미술관, 오사카동양도자박물관, 개인 소장 등을 포함해 8점이 전해진다. 그중 한 점인 이 청화백자가 지난 2023년 5월 경매에 나와 70억 원에 낙찰됐다. 한국 고미술 경매 사상 최고가였다. 당시 낙찰자 신원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번 전시에 공개됨으로써 이 회장이 매입한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그 옆에 자리한 ‘백자대호(白瓷大壺)’도 곡절 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2007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것을 이 회장이 127만 달러(당시 환율로 약 12억 원)에 낙찰받아 국내로 들여온 환수문화재이다. 높이 49㎝, 지름 50㎝로 현존 달항아리 중 가장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달항아리’라는 이름은 흰색의 둥근 모습이 보름달을 닮아 붙여졌다. 일반적으로 높이와 지름이 각각 45㎝ 이상이고 뽀얀 미색(米色)을 띠는 대호를 가리킨다.
“이 미색은 절대로 흉내 낼 수 없습니다. 보는 이의 감정을 비춰주는 오묘한 기물입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華而不侈·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의 경지이지요.”
안목 있는 애호가는 미술사가와 다름없다더니 딱 그가 그렇다. 호텔 경영자인 그는 어떤 계기로 컬렉터의 길을 걷게 됐을까.
“고교 때 수석(壽石)을 모았습니다. 제 고향이 지리산 자락의 경남 함양이에요. 산수(山水)가 좋아서 자연의 미감에 일찍 눈을 뜬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산 밑에 깔린 수석을 찾으러 다녔지요. 입시 공부는 안 하고(웃음)….”
그는 젊은 시절 대기업인 대우에 입사해 10년을 근무했다. 그때 상사로 만난 이우복(1936∼2024) 전 대우 회장과 가까이 지냈고, 훗날 미술품 수집가로서 동지의 정을 나눴다. 이번에 개관전의 하나로 이 전 회장이 수집한 도자기를 선보이는 ‘소중현대(小中顯大)’전을 하는 것은 그 인연 덕분이다.
그는 대우 퇴사 후 알루미늄 제조회사를 운영했고, 프리마호텔 창업자의 제안으로 호텔 경영을 하게 됐다. 그가 미술품 수집을 시작한 것은 호텔을 인수하기 이전인 1980년대 후반이다. 수석 아래에 깔 모래를 사러 갔다가 우연히 조선 후기 백자를 보고 마음이 동한 것이다.
“그걸 사 들고 갔다가 아내와 싸웠어요. 월급 생활을 하던 때였는데, 전세금 올려주려고 부은 2년짜리 적금으로 백자를 샀으니까요. 사고를 친 것이지요. 나중엔 아내도 이해해줬어요. 수집 귀신에 홀린 저의 병이 죽어야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요.”
그는 경매 회사 초청으로 미술품 수집에 관한 강연을 한 적도 있다. 당대의 컬렉터로 인정받는 그의 수집 원칙은 무얼까.
“작품을 보러 가면, 큐레이터들이 외국어로 설명을 합니다. 엘레강스하며 휴머니즘과 리얼리티가 있는 컨템퍼러리 아트로 감각이 모던하다는 등. 그런 남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나 혼자 작품과 대화합니다.”
그는 작품과 이야기를 나누며, 네 가지 관점에서 에너지를 살핀다. “우선 나에게 충만한 에너지를 주는가. 그런 작품이 가장 좋습니다. 다음으로 내 에너지를 뺏어가는가. 그러면 걸작이라도 집에 둘 수는 없는 거죠. 나와 작품의 에너지 상호작용도 따져야 합니다. ‘이발소 그림’처럼 에너지가 없는 것도 있지요.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끌림’입니다. 내게 기쁨을 줘야 가까이 두고 볼 수 있잖아요. 끌림 없이 트렌드 따라 구매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타계 1주기 기리는 ‘소중현대’展
생전 분청자 등 487점 기증받아
“한 사람의 미술사가로서 이우복 회장의 안목에 깊은 경의와 감사를 올린다.”(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
“하나하나 만지며 그 맛을 즐기시던 소운(紹芸) 선생님의 열기와 표정을 다시 떠올리니 가슴이 절절하다.”(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저명한 미술사학자들이 이렇게 찬사를 바친 ‘소중현대(小中顯大)’전. 더 프리마 아트센터 개관전의 하나다. 소운 이우복 전 대우 회장이 평생 수집한 도자기 487점을 선보인다. 고려청자 103점, 조선 분청자 3점, 조선백자 381점 등인데, 대부분 소품(小品)이다.
“이 소품들에 단순함과 세련됨, 질박함 등 모든 것이 있다고 하셨지요.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드러난다는 ‘소중현대’를 전시 제목으로 삼은 까닭입니다.”
이상준 더 프리마 회장은 이번 전시가 이 전 회장 1주기를 기리는 뜻도 있다고 했다. 이 전 회장은 친구인 김우중 회장과 함께 대우를 창립한 기업인이자 안목이 높은 미술품 수집가로 이름이 높았다. 최순우, 이동주, 정양모, 안휘준, 유홍준, 이태호, 윤용이 등 미술사가들과 폭넓게 교우하며 이른바 ‘문화당(文化黨)’을 만들어 스스로 당수를 맡았다.
그는 평생 한 점 한 점 사 모았던 도자 작품들을 타계 직전에 후배 기업인이자 수집가인 이상준 회장에게 기증했다. 이와 관련, 고인의 아들인 이두원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렇게 되돌아봤다. “아버님께서는 도자 작품들이 절대로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이상준 회장이라면 ‘내 수집품을 귀하게 여기고 잘 보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고, 저는 그 뜻을 받들어 양도하게 됐습니다.”
저마다 이익만 좇는 각다귀 세상에서 이런 우정과 신뢰는 만나보기 어려운 것이다. ‘소중현대’전은 그런 점에서도 귀한 뜻을 우리 시대에 전한다. 작은 그릇에 우주를 담은 조상들의 슬기와 더불어.
장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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