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영훈 레고그룹 본사 디자이너 중학교 때 첫 블록…평생의 길 열다 놀이가 바꾼 진로…디자이너의 탄생 덴마크 글귀…현실이 된 디자이너 꿈
레고그룹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최고가 되겠다는 욕심도 좋지만, 결국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열정이다.
조영훈 레고그룹 본사 디자이너의 방은 레고 작품들로 가득하다. 선반마다 각기 다른 색과 형태의 브릭들이 채워져 있고 한쪽 벽에는 직접 만든 창작물이 줄지어 서 있다. 정갈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공간이다. 오롯이 조영훈 디자이너 손끝으로 빚어낸 세계다.
레고그룹은 매년 9~10월에 ‘또 다른 이야기를 짓다’란 캠페인을 연다. 레고를 대중들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가게끔 하는 활동의 일환이다. 여행플러스는 이 캠페인과 함께 올해 레고 본사 디자이너로 새롭게 채용된 한국인 2명을 차례로 만났다. 첫 번째 주인공은 조영훈 디자이너다.
조영훈 디자이너 활동들 / 사진=본인 제공
조 디자이너는 2022년 5월 MBC에서 제작한 한국판 레고 마스터즈 프로그램인 블록버스터(LEGO Masters Korea, Blockbuster)에 출연했다. 한국 레고 유튜버 ‘늦가을(Late Autumn)’과 같은 팀으로 참가해 총 10라운드 중 7라운드까지 진출했고 총 8개의 창작 작품을 선보였다.
2023년 9월에는 덴마크 빌룬트서 열린 레고 하우스 마스터피스 갤러리에서 작품을 전시했으며 같은 달 덴마크에서 열린 스케르벡 팬 위켄드(Skaerbaek Fan Weekend, ANE)에서는 전시와 더불어 레고 마스터즈 세미나에도 참여했다.
이어 2023년과 2024년 6월 일본에서 개최한 재팬 브릭페스트 무대에 작품을 출품했다. 2023년과 지난해 8월 코리아 브릭파티에서는 전시 활동과 함께 레고 하우스 전시를 주제로 한 세미나 발표를 진행했다.
국내 활동도 꾸준했다. 2017년, 2021년, 2022년 12월 열린 브릭코리아 컨벤션에서 인기도상 3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1월에는 레고랜드 코리아 브릭 전시에 참가해 작품을 공개했다.
여행플러스는 레고그룹 본사 디자이너로 합류하기까지 다양한 발자취를 남겨온 조영훈 디자이너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Q. 레고 창작은 언제, 어떻게 접하게 됐나.
조영훈 디자이너 작품 (MOC – Ms. Jellyfish) / 사진=권효정 여행+ 기자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동생 생일 선물로 레고 세트를 사주셨는데, 동생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바닥에 흩어진 블록들이 나에게 넘어왔다. 원래 뭔가 조립하거나 만드는 걸 좋아했던 터라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Q.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조립 경험이 전공이나 직업 선택에도 영향을 줬나? 레고그룹 디자이너나 창작가를 염두에 두고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건가.
솔직히 레고그룹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제대로 알게 된 건 비교적 최근 일이다. 전공을 고르고 진로를 고민하던 시절에는 너무나 먼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다만 디자인이라는 큰 틀에서 이전의 경험들이 지금 진로에 영향을 줬다고 본다. 방향은 달라도 결국 무언가를 만든다는 점에서는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Q. IT 업계에서 UI·UX 디자인을 담당했다고 들었다. 당시 경험이 레고 창작에 도움이 됐나.
두 영역이 워낙 달라서 직접적인 도움이 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레고 창작은 개인의 감성과 생각을 온전히 담아내는 예술적 작업이라면, UI(사용자 인터페이스)·UX(사용자 경험) 디자인은 사용자 중심으로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최대한 배제해야 하는 작업이다. 오히려 정반대에 서 있는 만큼 두 가지를 오가며 작업에 몰입하는 묘한 재미가 있었다.
Q. 20대 초반부터 브릭 창작가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다. 활동명 ‘디스(DEES)’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조영훈 디자이너의 활동명 ‘디스(DEES)’ / 사진=권효정 여행+ 기자
특별한 의미가 담긴 건 아니다. 아주 어릴 때 ‘디스트로이어’라는 거창한 닉네임을 썼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유치하게 느껴졌다. 주변에서도 자연스럽게 ‘디스’라고 줄여 불러주다 보니 애착이 생겼고, 완전히 새로 짓기보다는 줄임말로 정착하게 됐다. 몇 년간 그렇게 불리다 보니 지금은 진짜 내 이름처럼 자리 잡았다.
Q. 레고 창작을 하는 과정에서 가족이나 친구들의 반대는 없었나?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창작을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다행히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온 취미라 공부에 크게 방해되지 않는 한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내가 성인이 되고 작품 활동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응원해주셨다. 우리 집 자체가 하고 싶은 걸 존중해주는 분위기였다.
내가 조금씩 이름을 알려가기 시작했을 때 부모님이 보여주신 자랑스러워하는 표정, 그리고 곁에서 보내주신 뜨거운 응원과 기대가 작품을 만드는 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
Q. 주로 로봇이나 드래곤 같은 상징적인 대형 작품을 창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감은 어디서 얻나.
조영훈 디자이너의 작품 /사진=권효정 여행+ 기자
많은 창작자들이 건물이나 자연물을 다루는 동안, 다른 길을 걷고 싶었다. 남들이 이미 다룬 주제보다는 내 색깔이 드러나는 작품을 원했다. 로봇이나 메카닉은 흔하지만 살아 숨쉬는 듯한 유기적인 형태를 가진 작품은 드물다. 멋져 보이는 걸 넘어서 내 가치관이 담긴 결과물을 만들고 싶었다.
레고 브릭처럼 내 생각을 표현하기에 그만한 재료가 또 어디 있겠나. 영감은 주로 영화나 만화 같은 대중 매체에서 얻는다. 때로는 신화나 실존 인물에서 이야기를 가져와 내 시선을 더해 작품으로 만든다.
Q. 관절 하나하나의 움직임까지 신경 쓴다고 들었다. 창작 과정은 어떻게 흘러가나.
조영훈 디자이너의 작품 /사진=권효정 여행+ 기자
먼저 만들고 싶은 캐릭터와 담고 싶은 메시지를 떠올린다. 작업 과정에서 주제가 바뀌기도 한다. 시각 디자인을 전공한 덕분에 스케치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다음 머릿속으로 필요한 부품들을 정리한 뒤 부품 사이트에서 하나씩 구해온다. 부품이 도착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치 생명을 불어넣듯 차근차근 조립해 나간다. 그렇게 한 덩어리의 생각이 형태를 갖춰간다.
Q. 다른 창작자들이 설계 프로그램을 사용하는데 상상력에 의존한 조립을 고집하는 이유는.
처음에는 직접 조립하면서 구상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그 경험이 상상력을 키우는 데도 큰 힘이 됐다. 다만 최근에는 부품 낭비를 줄이기 위해 프로그램을 조금씩 사용한다. 미리 설계를 해두면 불필요한 부품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Q. 레고그룹이 전개하는 놀이 인식 개선 캠페인 ‘또 다른 이야기를 짓다(Rebuild the World)’가 매년 이어진다. 올해는 ‘놀이는 계속돼야 한다’를 강조하는데 놀이의 힘은 무엇인가.
놀이란 결국 자신이 원하는 걸 즐겁게 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공부조차 놀이가 될 수 있다. 핵심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스트레스를 날리고 동시에 그 영역에서 자신의 능력을 무한정 확장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이다.
레고 브릭은 작은 부품 하나로도 머릿속 상상의 우주를 펼쳐낼 수 있는 놀라운 도구다. 아이들이 꿈꿔온 모든 상상을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어내고 실현하도록 도와준다. 창의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 데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확신한다.
Q. 레고 놀이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다고 보나.
조영훈 작가의 작품 Angel of Regression / 사진=권효정 여행+ 기자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걸 발견하고 그 속에 몰입한다. 과정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려움을 해결하는 힘을 기른다. 그런 힘이 모이면 결국 세상을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Q. 놀이가 사회적으로 더 많은 인정을 받기 위해 어떤 변화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나.
최근 키덜트 문화가 확산되면서 레고 놀이도 장난감에 국한되지 않고 취미로 자리 잡는 흐름이 뚜렷해졌다. 놀이가 주는 긍정적 효과를 더 널리 알리고 많은 사람들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린다면 자연스럽게 사회적 인식도 바뀌리라 본다.
Q. 레고와 놀이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수많은 부품을 자유자재로 조합해서 상상한 어떤 것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조립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주지만 오로지 나만의 세계를 완성해냈다는 그 성취감에서 나오는 진짜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Q. 레고그룹 디자이너에 도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조영훈 레고그룹 본사 디자이너의 방에 전시된 레고 작품들 / 사진=권효정 여행+ 기자
처음엔 그냥 취미였다. 그러다 2023년 레고 하우스(덴마크 빌룬트에 위치한 레고그룹의 브랜드 문화 체험 센터)에 내 작품을 전시하면서 꿈이 현실로 다가왔다. 그 전시를 계기로 본사를 직접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 순간 ‘여기서 일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레고 하우스에는 전시자들이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벽이 있다. 나는 거기다 ‘미래 레고그룹 디자이너 왔다 감’이라고 적었다. 솔직히 장난 반 진심 반이었는데, 불과 1~2년 만에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Q.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
개인 창작가가 아니라 상품 디자이너로 합류한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제품을 만드는 게 우선이다. 내가 만든 걸 사람들이 즐겁게 조립하는 모습을 보는 게 지금 가장 큰 바람이다.
한국인 선배 디자이너들처럼 나도 빨리 내 작품을 제품으로 내놓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유기적이고 화려한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앞으로는 신화나 판타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 같은 걸 제품으로 구현해보고 싶다. 특히 동물이나 상상의 생물을 좋아해서 언젠가는 그런 걸 제품으로 선보이고 싶다.
Q. 마지막으로, 꿈을 현실로 만들고 싶은 친구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레고그룹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 최고가 되겠다는 욕심도 좋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열정이다. 본업이 있더라도 레고에 대한 애정은 놓지 않았으면 한다. 꾸준히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 그 진심이 본사에 닿을 기회가 분명히 온다.
내 경우에는 레고 하우스 전시에 초청받았던 게 첫걸음이었다. 팬들이 놀이를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그 힘이 결국 현실을 바꾸는 동력이 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