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의 응시, 그리고 삶의 응축
90년대부터 담긴 작가의 시선
예술 작품과의 대화 두드러져
예술 비평의 역할은 작품의 가치를 새롭게 도출해 올바른 담론을 형성하는 데 있다. 평론의 역할이 적어지는 현실 속에서 지역 예술인의 작품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받을 기회도 희소해지고 있다. 작품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담론은 건강한 예술 생태계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춘천문화재단과 강원도민일보는 ‘핀포커스:예술의 가치를 나누는 시선’을 통해 예술 작품에 대한 시선을 확장한다. 공연, 시각, 문학 분야의 신작을 선보이는 예술인을 대상으로 전문평론을 강원도민일보 지면에 소개한다.

1. 부재의 자리, 남은 자의 언어: 김한숙 소설집 리뷰
김한숙의 여덟 편의 단편소설에는, 1990년대 중반부터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 작가의 삶과 글쓰기의 동선, 그리고 시대의 부침 모두가 담겨 있다. 강원도의 호수와 대구의 지하 다방, 서울의 요양병원과 동성로의 음악실까지 각기 다른 공간과 시간이 배경으로 놓여 있지만, 거기에는 살아가며 우리가 마주(해야)할 세계들이 있고, 그것을 감당하며 살아내는 여러 인물이 있다.
우선 소설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남은 자’들이다. 그들의 상실은 실제 가까운 이의 죽음(「그곳에 도착했나요」 「남은 자들」)이기도 하고, 인간에 의한 지물지형의 파괴(「물거울」)이기도 하며, 지난 시절 및 열망의 부재(「눈이 지나간 자리」)이기도 하다. 우선 남은 자의 상실감과 애도의 의례가 곡진하게 그려진 「그곳에 도착했나요」에는 죽음을 둘러싼 두 언어(남겨진 자들의 감각, 건조한 진료기록)가 교차되어 있다. 소설 속 진료기록은 차갑고 압축된 방식으로 죽음의 사실성을 드러낸다. 이 기록이야말로 현대 사회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의 전형이자, 동시에 산 자가 마주해야 하는 충격이다. 이때 독자는, 두 언어 사이에서 죽음이라는 사건을 강렬하게 경험하게 된다. 진료기록은 어쩌면 제도의 언어의 가장 극단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남은 자들의 감각은 엄마의 옷이나 바람, 정원과 자연 풍광 속에서 현재형으로 존재한다. 이 감각은 결코 행정이나 제도의 언어로 환원될 수 없다.
「물거울」은 기억과 망각, 개발과 상실을 진지하게 질문하는 작품이다. ‘물거울’로 비유되는 소설 속 호수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흔적, 사라진 생태 등을 비추는 매개다. 주인공이 그곳에서 만난 여인으로부터 듣는 이야기도 사사롭지 않다. 여자의 개인적 이야기는 지워지고 망각된 장소와 그 삶들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그에 비해 레고랜드 직원의 말들은 무언가를 파괴하고 망각시키는 문명, 시스템의 말을 닮아있다. 주인공이 만난 여인이 항간에서 말하던 진짜 ‘유령’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이 목격했다는 유령은, 사라지고 잊혀졌지만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말을 거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 유령이 이곳저곳의 무수한 우리 삶을 배회하고 있음도 틀림없다.
무언가·누군가가 존재했던 자리에 대한 사려 깊은 성찰은 「남은 자들」에서도 엿보인다. 이 소설에도 죽음과 부재가 있다. 주인공에게 동생의 죽음은 내내 껴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거대한 비극이라기보다 차라리 일상의 구석, 담장 너머 이웃의 말, 카페 앞 쪽지, 평상 밑 고양이 같은 작은 장면에 은근하게 스며있다. 누군가의 빈자리(죽은 동생, 사라진 고양이)를 남은 자들이 서로 돌보며 이어가는 듯한 구조도 특히 중요하다. 요양보호사가 남긴 메모(“어르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도 소설 너머 독자에게까지 의미심장한 울림, 지침으로 작동한다. 즉, 이 소설 속 부재나 상실은 견뎌야 할 고통스러운 것이 더이상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남은 이들끼리 서로 돌보며 연결되어야 할 과제를 남긴다. 엄마를 돌보고 고양이를 돌보며 서로의 안위를 염려하는 소설 속 행위들은 이 세계가 지속될 수 있는 중요한 이치를 잔잔하게 전달한다.
한편, 아마도 작가의 젊은 시절 기성세대와의 불화와 자기 선언이었을 성장서사도 흥미롭다. 방치된 아이의 상실감과 불안에 대해 섬세하게 그린 「열대어」는 여성 성장소설의 흥미로운 사례로 읽힌다. 이 소설에서 수족관은 엄마–딸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매개하고, 주인공의 내적 풍경을 대리하는 상징물처럼 기능한다. 아름답지만 폐쇄된 세계, 엄마에게 닿지 못하는 욕망, 그리고 죽음/상실의 불안이 여기에 응축되어 있다. 물 밖으로 꺼내어져 죽어가는 열대어와 어린 주인공이 겹쳐보이는 장면은, 삶의 무게를 어렴풋이 직면하는 모든 성장의 문턱을 떠올리게 하니 처연하다. 절망과 희망이 미묘하게 뒤섞인, 서정적 울림이 있는 소설이다.
이와 달리 「천사들의 진공관」은 좀더 자기 선언적이다. 소설 속 아버지는 주인공에게 있어서 존엄과 억압의 양가성을 지닌 인물이다. 아버지의 세계(빈티지 오디오와 클래식)는 주인공에게 숭고함의 대상이면서도 억압적인 초자아다. 주인공이 아버지의 세계와 결별하면서, 연인과 함께 “현재와 미래”의 음악을 듣겠다는 결심에 이르는 결말은 익숙한 성장, 가족로망스의 구조를 갖는다. 다소 직설적인 자기 선언이지만, 오늘날 기성세대와 불화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성장서사가 잘 보이지 않게 된 문학적 흐름에 대해서도 역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열대어」는 1996년 『영남일보』 1996년 신춘문예 당선작이고, 「천사들의 진공관」은 『대구일보』 1995년 신춘문예 당선작(원제는 ‘둥지와 날개’)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두 작품 모두 이 작가의 출사표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그리고 당대에 어떤 문학적 의미를 지녔을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한편, 인접 예술(시, 회화, 음악)과의 상호텍스트성이 짙은 것도 김한숙의 소설의 특징이다. 앞서 언급한 「천사들의 진공관」 이외에도 「눈이 지나간 자리」 「그때 그 저수지」 「독자」 등은 실제 작가, 작품으로부터 얻은 영감이 밀도 높게 서사화되어 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술과 문학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의의도 크다. 예를 들어 「그때 그 저수지」에는 표면적으로 한 커플의 불행한 관계가 서사화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불행에는, 단순한 성격 차이가 아닌 서로 다른 두 세계 사이의 불화가 가로놓여 있다. 그들의 불화는 예컨대 ‘저수지의 기억과 시의 세계 vs. 로또와 신문 속 숫자의 세계’로 대비된다. 한편, 독서와 책이라는 제재를 통한 연결(만남)을 서사화하는 「독자」는, 오늘날 디지털 시대의 독자에게는 다소 낯선 풍경처럼 읽힐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러한 행복한 읽기 공동체의 가능성은 결코 디지털 세계라고 하여 부정적이지 않다. 실제로 문자를 통한 만남은 미디어를 달리하더라도, 소설 속 주인공들의 만남처럼 지금도 곳곳에서 무수한 연결로 이어지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술, 문학 등의 의미에 대해 눈의 풍광과 더불어 아름답게 역설하는 소설이 표제작 「눈이 지나간 자리」다. 표면적인 서사는 공허한 삶과 겨루는 이의 이야기이지만, 이면에는 작가 로베르트 발저의 삶과 글쓰기를 추적하고 애도하며 위로받는 서사가 놓여 있다. “눈에 파묻혀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여. 비록 전망은 없어도 생은 아름답지 않았는가.”라는 발저의 말은 이 소설을 가로지른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살아내게 하는 힘”이라고 적은 ‘당신’의 말도 이 소설을 관통한다. 이 ‘아름다움’이란 우선은 문학과 예술이 내내 추구해 온 ‘생의 자유’에 비견된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구름과 하늘을 동무삼아 밤낮으로 걸었던 예술가”에 대한 동경은, 모든 문학과 예술이 추구하던 것에 다름아니고 그것은 곧 우리 모든 삶의 목적이자 이유일지 모른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당신’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생각하는 ‘부재’ ‘지워짐’은 마치 ‘쓰고 스스로를 지우는’ 역설로서 존재하는 글쓰기를 연상시키지만,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작가적 ‘자유’의 극단일지 모르겠다.
여덟 편의 소설에 누적되었을 시간과 삶과 글쓰기의 흔적을 가늠해보니, 소설에 빈번하게 계절과 자연의 언어가 교차되고 있었다는 점도 새삼 떠오른다. 계절의 리듬이나 자연의 풍광은, 여전히 인간이 존재의 한계 앞에서 택하게 되는 가장 자연스러운 장면이기도 하다. 이 소설들은 한 시절의 일단락이기도 하지만 다시 한 시절을 여는 첫 페이지이기도 할 것이다. 지금 읽은 소설들에서처럼 우리 삶은 그보다 더 큰 계절이나 자연의 이치를 닮아있고, 그것은 늘 우리를 이끄는 더 큰 세계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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