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문고 ‘애서가 손형모의 서재’ 전시 60년 모은 책들이 '보물'

백지영 2025. 9. 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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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진주문고 생활 갤러리 아트스페이스진주에서는 특별한 전시 하나가 열렸다.

대한제국 말 세상에 나온 빛바랜 고서부터 쟁쟁한 진주 출신 문인의 신간까지 116년을 압축한 책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전시 '애서가 손형모의 서재 1909-2025 : 장지연에서 김언희까지'다.

1986년 사회과학 서점 '개척서림'으로 시작한 진주문고가 내년 4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전시로, 진주지역 애서가 손형모(71) 씨가 평생 소장해 온 고서 등 서적 100종으로 구성됐다.

손 씨는 진주문고가 '개척서림'에 이어 '책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던 1988년부터 서점과 인연을 맺어온 오랜 단골이다.

진주 출생의 손 씨는 1960년대 진주중·고교 통학길 진주 시내에서 마주하던 헌책방에 매료돼 용돈으로 고서를 한두 권씩 사 모으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책 수집가의 길로 들어섰다. 경상국립대 국어교육학과를 거쳐 국어교사로 근무했던 그는 방학이면 국내 여행길에 올라 타지역 헌책방을 탐방했을 정도로 자칭 '책에 미친' 사람이었다. 국어 교사로서 학생을 잘 가르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지금은 헌책방을 찾기 쉽지 않지만, 그는 빳빳한 새 책만큼이나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고서를 아낀다. 잘 보관하고 물려줘야 할 우리의 정신적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다.

손 씨는 자신이 수집한 책 수만 권이 자신에게 온 것은 운명이자 인연이라 믿는다. 그렇게 운명처럼 자신의 서재를 채운 책들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태훈 진주문고 대표는 "책을 사랑하고 서점을 자주 오가는 오랜 단골 고객인 만큼 장서가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며 "손형모 선생께 수집해 온 오래된 책들을 전시로 선보이자는 제안을 했는데 처음에는 고사하셨다"고 회상했다.

60년이 넘는 세월 모으며 참으로 귀하게 여겨왔던 만큼, 내 서재에서 언제나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싶었다.

마음이 바뀐 것은 지난 5월 진주문고 아트스페이스진주에서 열린 한 사진전을 보고서다. 사진전에 감명받은 그는 사진 작가에게 자신이 수집한 1966년 발행 사진연감을 선물했다.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귀한 사진연감을 받아 들고 기뻐하던 사진작가의 모습은 손 씨가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품게 했다. 이제는 시민들과 공유하고 함께 공감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번졌다.

그렇게 고사 끝에 시작된 전시는 손 씨가 아껴온 책을 고르고 진주문고 여서재 팀이 진열하는 구조로 진행됐다. 창립 40주년을 앞두고 뜻깊은 기획전을 선보일 수 있게 된 진주문고는 손 씨의 책들을 전시할 나무 전시대를 새롭게 제작하며 애정을 쏟았다.

전시에서 선보일 책 100권을 고르는 작업은 1달이 넘는 대장정이었다. 수만 권 중 우선 1000권을 고른 후 다시 500권, 300권, 200권, 150권, 100권으로 추려가는 작업을 반복했다. 진주정신을 주제로 진주의 역사를 품거나 진주 출신 혹은 진주와 관련 있는 시인·작가·예술인 등의 책을 훑어보며 고민을 거듭했다.

마침내 고른 책은 1909년 위암 장지연이 집필한 '만국사물기원역사'(황성신문사)부터 진주 출신 시인 김언희가 올해 발간한 시집 '호랑말코'(문학과지성사)까지 116년을 아우른다.

100권의 책 중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책은 위암 장지연의 '만국사물기원역사'다. 대한제국 말기, 격변하는 세계 속에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던 한 지식인 장지연의 고뇌와 새로운 지식을 통해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시대적 열망을 고스란히 담은 책이다.

위암 장지연이 진주와 깊은 연을 지녔다는 점도 남다르게 다가왔다. 1905년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투옥됐던 위암 장지연은 경남일보 주필로 있던 1910년 10월 매천 황현의 '절명시'를 게재했다가 신문이 정간되는 아픔을 겪는다. 손 씨는 언론인으로서 위암 장지연이 경남일보에 실었던 황현의 '절명시'가 진주 정신과 맞닿는다고 생각한다.

손 씨는 "진주는 민란과 형평운동, 논개 등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이들이 많은 지역"이라며 "진주 정신은 무엇이며 문학에서 진주 시인들은 어떤 시 세계를 보여줬는지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진주 사람들의 정체성을 전시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전시에는 1945년 출간된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등 우리말글의 역사를 드러내는 다양한 책들과 함께 최남선·박목월·유치진·이상·심훈 등과 같이 당대 유명 작가의 대표작, 루소·사르트르·입센·마키아벨리 등의 초기 번역서 등도 전시됐다. 1955년 진주시교육위원회에서 펴낸 '진주의 고적과 명승' 등 진주를 소개하는 책과 진주 작가인 이경순·강희근·설창수·정목일·하종갑·정동주·박노정·이형기 등 다양한 문인들의 책도 소개했다. 허수경·김언희 시인 등 진주를 바탕으로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넓힌 중요한 작품들도 함께 전시하는 등 진주라는 고유한 공간과 역사가 가진 의미와 가치를 조명했다.

전시는 당초 8월 1일부터 14일까지 2주간 열릴 예정이었지만, 미처 기간 내에 찾지 못한 이들이 잇따라 연장을 요청하고 나서면서 8월 27일까지 이어졌다.

손 씨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가를 알아줘서 뿌듯한 마음"이라며 "귀한 책들을 시민들에게 공개해 줘서 고맙다는 감사 전화들을 받으니 전시에 나서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백지영기자 bjy@gnnews.co.kr
 
경상국립대 국어교육과 재학 당시 캠퍼스 내 바위에 걸터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손형모 선생. 사진=진주문고
위암 장지연 '만국사물기원역사' 등 1909년부터 1945년 사이 발행된 고서들.
'애서가 손형모의 서재' 전시 모습.
'애서가 손형모의 서재' 전시 모습.
'애서가 손형모의 서재' 전시 모습.
위암 장지연 '만국사물기원역사' 등 1909년부터 1945년 사이 발행된 고서들.
'애서가 손형모의 서재' 전시 모습.
1909년 출간된 위암 장지연의 '만국사물기원역사'와 1917년 출간된 '점주맹자'.
'애서가 손형모의 서재' 전시 모습.
'애서가 손형모의 서재' 전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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