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미래와 과거의 싸움’이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1882년 1월 첫날 자신이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새해 결심을 밝히는 글을 쓴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자신의 소망과 가장 소중한 생각을 감히 말한다. 그래서 나도 지금 내가 나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 올해 처음으로 내 마음을 스쳐 가는 생각, 다가올 삶에서 내게 근거와 보증과 달콤함이 될 생각을 말하려 한다.” 이어 니체는 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니체의 고유한 사상 가운데 하나라 할 ‘운명애’(아모르 파티, amor fati)가 처음 공표되는 장면이다. 니체에게 운명애란 ‘네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명령문이다. 그렇다면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니체는 새해 첫날의 그 글에서 ‘필연적인 것을 아름답게 보는 것, 그리하여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피해 갈 수 없는 것, 겪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면 거부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여 아름다운 것으로 느끼는 것이 운명을 사랑하는 법이라는 얘기다.
운명애란 필연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필연이란 대개 이미 벌어진 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필연을 긍정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니체는 그 무렵 쓴 ‘오류’에 관한 글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한때 진리로서 그대가 사랑했던 것이 이제 오류로 나타나면 그대는 그것을 배척하고는 그대의 이성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 시절에 저 오류는 지금 그대가 생각하는 참된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대에게 꼭 필요했을 것이다.”
젊은 날 니체는 쇼펜하우어 철학과 바그너 음악을 진리의 복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 철학과 음악이 오류임을 알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사랑했던 젊은 날의 기억을 모두 버려야 하는가. 한때 진리로 받들었던 것들이 젊은 날을 통과하는 데 꼭 필요한 경험이었다면 그 필연을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른 태도 아닌가. 잘못된 것도 한때는 진리의 힘으로 삶에 도움을 주었으므로 그 오류를 부정만 할 것이 아니라 좋은 경험으로 간직하는 것, 이것이 운명을 사랑하는 법이다.
이 운명애를 이야기하기 다섯달 전에 니체는 알프스 고산 마을 실스마리아에서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라는 일생일대의 체험을 했다. 마치 모래시계가 거꾸로 세워져 다시 떨어지듯이 이 우주 전체의 삶이 한 알의 빠짐도 없이 그대로 되풀이된다는 생각이 계시처럼 들이닥쳤다. 그런 영원회귀 속에서 니체 자신의 삶도 한 치의 오차 없이 무한한 시간에 걸쳐 영원히 되풀이되리라는 영감이었다.
“너는 현재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다시 한번, 나아가 수없이 몇번이고 되살아야 한다. 거기에는 어느 것 하나 새로운 것이 없을 것이다. 일체의 고통과 기쁨, 일체의 사념과 탄식, 네 삶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되풀이돼야 한다.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언제까지나 다시 회전하며, 작은 모래알에 불과한 너 자신도 똑같이 회전할 것이다.”
이 계시 체험은 니체에게 세계의 비밀을 알았다는 희열을 줌과 동시에 말로 설명할 길 없는 공포를 안겼다. 왜 니체는 공포를 느꼈는가? 자신의 삶이 되풀이된다면 자신에게 슬픔과 괴로움을 주었던 모든 것들을 다시 그대로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니체는 영원회귀 계시 앞에서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똑같이 되풀이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니체는 스스로 이렇게 답했다. ‘영원한 반복이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과 의욕의 대상이 되려면, 내가 사는 이 삶을 가장 창조적인 삶으로 가꾸어야 한다. 이제껏 살아온 삶의 오류를 극복해 더 좋은 삶, 더 창조적인 삶으로 만들 때 삶은 긍정과 의욕의 대상이 된다.’ 니체는 영원회귀 체험을 운명애의 명령으로 바꾸었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과거를 무작정 수용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발판으로 삼아 삶을 더 높이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삶 전체가 다시 돌아오더라도 우리는 그 삶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삶에 타당한 것은 대개 집단의 삶에도 타당하다. 운명애도 마찬가지다. 집단의 운명을 부르는 말이 역사다. 에드워드 핼릿 카는 역사를 두고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지만, 더 찬찬히 생각하면 역사는 ‘과거와 미래의 대화’다. 역사란 ‘미래를 앞에 두고 과거를 읽음으로써 현재를 여는 일’이다. 어떤 미래를 불러올 것인가 하는 목표가 분명하지 않으면 과거를 바르게 읽을 수 없고 현재를 제대로 밝힐 수 없다. 과거를 바르게 읽는다는 것은 과거의 유산 가운데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 자산으로 삼아야 할 것과 싸워서 이겨내야 할 것을 명확히 가른다는 뜻이다. 그 가름의 척도를 주는 것이 우리의 미래, 우리가 실현해야 할 꿈이다. 그러므로 역사란 ‘미래와 과거의 싸움’이다. 미래를 가슴에 품고 과거가 남긴 폐해를 극복하는 것이 역사다.
20세기 사상가 함석헌은 일제강점기 한복판에서 눈물을 쏟아가며 통한의 한국 역사를 쓰다 말고 탄식했다. “있는 것은 압박이요 부끄러움이요 찢어지고 갈라짐이요, 잃고 떨어짐의 역사뿐이다. 그것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슬픔이다. 세계의 각 민족이 다 하나님 앞에 가져갈 선물이 있는데 우리는 있는 게 가난과 고난밖에 없구나, 할 때 천지가 아득하였다. 이집트와 바빌론은 문명의 시작이라는 명예를 가졌고, 중국은 도덕을, 그리스는 그 예술을, 로마는 그 정치를 가지고 가겠지만 한국은 무엇을 가지고 갈 터인가?”
그 통탄 속에서 떠오른 것이 ‘고난의 역사’였다. 슬픔과 비참뿐인 고난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다. 우리가 가져갈 것은 고난밖에 없다. 그러나 함석헌이 고난을 이야기한 것은 고난에 주저앉자는 것이 아니었다. 고난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지 체념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돌아보면 인류의 역사가 고난의 역사 아닌 것이 없다. 한반도 민중은 그 고난을 더 지독하게 더 처절하게 겪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고난을 극복하는 것은 ‘역사의 뜻’을 드러내는 길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함석헌은 쓴다. “세계 역사 전체가, 인류가 가는 길 그 근본이 본래 고난”이기에 우리의 고난은 가시 면류관을 쓴 고난이고, 그 고난을 극복하는 것은 세계사가 우리에게 준 사명이다. “고난은 인생을 깊게 만든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개인에게서나 민족에게서나 위대한 성격은 고난의 선물이다.” 함석헌이 말하는 ‘위대한 성격’을 다른 말로 하면 ‘위대한 정신’이 될 것이다. 고난이 위대한 정신을 만든다.
박정희 ‘유신 쿠데타’가 일어난 1972년 겨울 국외에서 반독재 투쟁을 하던 김대중은 ‘망명 일기’에 이렇게 쓴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나라는 만들 수 있다.” 민주주의가 마지막 불씨마저 꺼져버린 그 암흑의 시기에 김대중은 일기장에 민주주의를 되살려 내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또 다진다. 김대중이 일기장에 피로 쓴 ‘가장 훌륭한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함석헌이 말한 나라, 고난을 이겨냈을 때 형성되는 위대한 성격, 위대한 정신을 품은 나라일 것이다. 그 나라는 자유롭고 평등하고 창조적인 나라, 세계 모든 나라에 민주주의의 척도이자 모범이 되는 나라일 것이다.
그런 나라를 이루려면 한반도 남쪽과 북쪽이 함께해야 한다. 또 남과 북이 함께하려면 우리가 겪어온 고난의 상징과도 같은 분단 체제를 넘어서야 한다. 분단은 외세가 강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주체적 역량 부족이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분단은 여전히 욱신거리는 한반도의 상처다. 내란 세력이 그 기괴한 쿠데타를 저지를 수 있었던 것도 남북의 군사적 대치라는 분단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단을 극복하려면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변해야 한다. 철조망을 두고 총부리 겨누기를 계속하는 것은 고난에 주저앉자는 것이다.
억지로 나뉜 것은 다시 하나가 돼야 하고 하나가 돼야만 아름다운 여럿을 꽃피울 수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공화국’이나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민주공화국’은 그 본질에서 보면 둘이 아니다. 인민공화국은 인민이 주인 되는 나라이고 민주공화국은 국민이 주인 되는 나라다. 국민-인민이 주인으로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나라를 만든다는 그 근원적 목표가 일치하기에 남과 북은 다시 만날 수 있다. 이 분단을 이겨내고 더 큰 하나를 이룰 때 우리는 ‘위대한 성격’을 갖춘 나라로서 위대한 정신을 세계에 나누어줄 수 있을 것이다. (끝)

고명섭 | 언론인.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생각의 요새’, ‘광기와 천재-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kallipolis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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