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힐링속으로-경북을 걷다] 81. 경주 '동남산 가는 길'

황기환 기자 2025. 9. 2.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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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신라 흔적 품고, 역사·자연 숨 쉬는 길…시간 거슬러 걷는 듯
'동남산 가는 길' 출발지인 월정교 모습

경주 남산은 흔히 '박물관보다 더 큰 야외 박물관'이라 불린다.

산 곳곳에 불상과 탑, 왕릉과 절터가 흩어져 있어 천년 신라의 종교와 정치, 생활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남산 동쪽 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동남산 가는 길'은 신라인들의 흔적을 가장 가까이에서 체험할 수 있는 코스다.

월정교에서 출발해 염불사지 삼층석탑까지 약 8km, 두세 시간을 걸으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길의 풍경을 담아 봤다.
 
경북산림환경연구원 내 '쳔년숲 정원' 입구 모습
경북산림환경연구원 옆에 조성된 '동남산 가는 길'

△길 위에서 배우는 역사

동남산 가는 길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다. 월정교에서 염불사지 삼층석탑까지 이어지는 여정은 신라 불교와 정치, 생활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다.

걷는 동안 만나는 불상과 탑, 왕릉과 절터는 신라인들의 신앙과 이상을 증언한다. 이 길은 단순한 관광 코스를 넘어, 세계인에게 신라 천년의 문화와 정신을 보여줄 소중한 무대가 될 것이다.

시민과 관광객들도 '동남산 가는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역사를 공부하는 체험이라고 입을 모은다.

동남산 가는 길을 걷는 일은 곧, 천년의 신라와 대화하는 경험이다.
 
남산동 동서삼층석탑

△월정교와 인용사지, 남천이 들려주는 시작의 노래.

여정의 출발점은 신라 왕궁의 정문 역할을 하던 월정교다.

남천 위를 가로지른 웅장한 목교는 복원된 지 몇 해 되지 않았지만, 이미 경주의 대표 명소로 자리 잡았다. 월정교에서 국립경주박물관 방향으로 300m쯤 걸으면 인용사지가 나타난다. 절은 사라지고 기단과 석재만 남았지만, 고요한 터가 오히려 오래된 불교문화의 흔적을 더 선명히 보여준다.

조금 더 걸으면 월성교가 나온다. 이곳이 본격적인 동남산 가는 길의 관문이다. 갈림길 옆에는 '동남산 가는 길 종합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여기서부터가 진짜 '문화유산 탐방로'임을 알려준다.

△반달마을과 춘양교지, 사라진 다리의 기억.

월성교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반달마을이다. 이름처럼 반달 모양의 마을길을 따라 걷다 보면 춘양교지가 나온다. 입구에는 근처에서 발굴한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석재가 무더기로 쌓여 있어, 신라인들의 토목 기술을 짐작케 한다.

현재 다리 흔적만 남아 있는 춘양교는 월정교와 함께 월성의 북쪽과 남쪽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춘양교도 2018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한 월정교 처럼 복원한다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남천을 건너 왕래할 수 있는 경주의 또 다른 명소가 될 수 있다.
 
남산불곡 마애여래좌상

△불곡마애여래좌상, 신라 불상의 소박한 아름다움.

마을을 벗어나 경주IC와 연결되는 산업도로 밑을 지나면 길은 다시 남천을 따라 이어진다. 이 구간은 남산 자락이 바로 오른편에 펼쳐져, 걷는 내내 산과 강이 동행한다. 도로를 따라 1km쯤 걷다 보면 '불곡마애여래좌상' 이정표가 보인다.

숲길로 접어들어 440m를 오르자, 바위에 새겨진 불상이 숲 속에서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높이 4m에 달하는 여래좌상은 신라 후기의 대표적 마애불로,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조형미가 특징이다.

바위에 깊이가 1m나 되는 감실을 파고 만든 여래좌상이다. 불곡마애여래좌상은 그 자체로 신라인들의 종교관과 생활관을 보여주는 산증인이다. 이 감실불상은 경주 남산에 남아 있는 신라 석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로 삼국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이 불상으로 인해 계곡 이름을 불곡이라 부르게 됐다.

△옥룡암과 탑골마애불상군, 기도와 신앙의 터전.

도로로 내려와 다시 걷다 보면 옥룡암 주차장 이정표가 나타난다. 주차장과 연결된 마을 안길을 따라 400m쯤 걸으면 숲속에 작은 주차장이 나온다. 이곳에서 불과 100m 거리에 있는 옥룡암 뒤편에 탑골마애불상군이 숨어 있다.

이곳은 바위 면에 새겨진 보살상과 작은 석탑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독특한 공간이다. 특히 옥룡암은 지금도 기도객의 발길이 잦다. 이곳은 하나의 바위면에 불상, 비천, 보살, 승려, 탑 등 다양한 모습이 새겨져 조각 장인의 머리속에 불교의 세계를 기리려는 뜻이 역력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옥룡암과 탑골마애불상군은 단순한 문화재를 넘어, 오늘까지 이어지는 '살아 있는 신앙 공간'임을 보여준다.

△미륵곡석조여래좌상, 웅장한 기운의 불상.

이어지는 길은 마을 안길과 들판길을 지나, 마을 안에 조성된 제법 넓은 주차장과 연결된다. 이곳에서 남산 자락으로 300m가량 오르면 미륵곡석조여래좌상이 나온다.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이 불상은 신라 후기의 대표 석조불상으로, 웅장한 덩치와 간결한 조각 기법이 돋보인다.

바위와 불상이 한 몸처럼 어우러져 있어 마치 자연 전체가 신앙의 대상인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불상은 사진으로 볼 때는 평범해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압도적인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숲길과 화랑교육원, 자연과 교육이 만나는 공간

미륵곡을 둘러 본 후 산 아래에 위치한 '갯마을회관' 앞 이정표를 지나 마을 길을 잠시 걷다 보면 경북환경연구원 표지판이 나온다. 이정표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데크다리를 건너면서 울창한 숲길이 펼쳐진다.

길 양옆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그 사이로 바람이 흘러들며 청량감을 더했다. 시민들은 이곳을 도심 속 힐링 코스로 즐겨 찾는다. 숲길 끝에는 화랑교육원이 자리한다. 이곳은 신라 화랑들의 기개와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공간이다. 청소년들이 수련과 체험학습을 통해 신라 정신을 배우는 장소로 활용된다.
 
헌강왕릉
정강왕릉

△헌강왕릉과 정강왕릉, 소나무 숲에 잠든 왕들.

둘레길은 헌강왕릉으로 이어졌다. 차도에서 남산으로 연결된 숲길을 따라 약 200m를 올라서니, 울창한 소나무 숲 한가운데 장엄한 봉분이 자리한다.

신라 49대 헌강왕의 무덤이다. 쇠퇴기에 접어든 신라의 군주였지만, 남산 자락에 묻히며 왕조의 마지막 기개를 보여준다.

헌강왕릉에서 불과 380m 떨어진 곳에는 제50대 정강왕릉이 있다. 두 왕릉을 잇는 숲길은 햇살조차 쉽게 스며들지 않는 고요한 길로, 걷는 내내 경건함이 감돈다.
 
통일전 모습

△통일전, 삼국통일의 정신을 기리다.

왕릉 구역을 지나면 길은 통일전으로 이어진다. 통일전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한국의 통일 의지와 염원을 밝히기 위해 조성됐다. 1977년에 건립된 통일전에는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큰 공을 세운 신라의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 그리고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문무왕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관광객들은 통일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거나, 삼국통일의 의미를 되새겼다.
 
서출지 전경

△서출지와 남산 한옥마을, 고즈넉한 풍경.

통일전을 지난 둘레길은 서출지와 남산 한옥마을로 이어진다. 서출지는 신라 왕궁의 연못으로, 전설에 따르면 왕비가 기도를 올리던 곳이다. 지금은 연못가에 수련이 피어나고, 오리들이 헤엄치며 평화로운 풍경을 자아낸다.

남산 한옥마을은 기와지붕과 한옥 담장이 어우러져, 걷는 이로 하여금 잠시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염불사지 삼층석탑

△염불사지 삼층석탑, 여정의 마무리.

마지막으로 동남산 가는 길은 남산동 동서삼층석탑을 지나 염불사지 삼층석탑에 이른다.

염불사지에는 동서로 마주 선 두 개의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조용히 마무리하며 동남산 가는 길의 여정을 마친다.

석양이 탑을 비추며 황금빛으로 물들자, 마치 천년의 시간이 이곳에서 응결된 듯한 장엄함이 느껴졌다.

동남산 가는 길은 자연과 문화유산이 조화를 이루는, 정말 아름다운 길이다.

신라 천년의 숨결을 따라 걷는 듯한 경험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