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랑기부] 일제강점기 탄생한 국민 간식 '진해콩' 아시나요

이원재 기자 2025. 9. 2.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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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사랑기부, 좋지 아니한가]
31. 경화당 진해 콩과자

이정제 대표 1915년부터 이어온 가업 물려받아 운영
콩·밀가루·설탕으로 만들어 은은한 단맛·고소함 특징
학생·군인 간식 인기...1990년대~2000년대 전성기
"안 될 때도 있지만 전통 이어가며 다시 사랑받고파"
창원 진해구에는 110년 동안 지역민의 사랑을 받아온 독특한 과자가 있다. '진해콩'으로 더 유명한 경화당이 만드는 '진해 콩과자'다. 일제강점기 시절 탄생한 콩과자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한 자리를 지키며 진해의 명물이자 자부심으로 자리매김했다. 대를 이어서도 변함없는 맛으로 지역민에게 사랑받는 콩과자 이야기를 이정제(69)대표에게 들었다.
이정제 대표가 경화당 앞에서 진해 콩과자를 들고 있다. /이원재 기자

◇110년간 명맥 이어온 과자 = 콩과자는 콩가루와 밀가루를 반죽해 콩 모양으로 구워내 설탕을 입힌 과자다. 한입 깨물면 바삭하게 부서지며 고소한 콩 향이 입안에 퍼진다. 씹은 후 은은한 단맛이 뒤따른 것도 매력이다. 기름에 튀기지 않아 담백하면서도 중독성있는 맛에 자꾸 손이 가는 것도 특징이다. 지금도 군항제를 찾는 관광객이나 진해 출신 사람들은 "어릴 적 문구점에서 사 먹던 맛 그대로"라며 발걸음을 멈춘다.

콩과자의 출발은 1915년 일제강점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인 사장과 한국인 기술자 두 명의 손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과자가 흔하지 않았는데, 진해 지역에서 많이 재배하는 콩을 주재료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에서 개발됐다.

"진해가 일본말로 '진카이'였고, 콩은 '마메'니까 '진카이 마메'라고 불렀어요. 일제강점기 시대였으니까요".

당시 한국인 기술자 중 한 명이 바로 이 대표의 외삼촌이었다. 이 대표의 아버지가 외삼촌에게 기술을 전수받아 1938년 '경화당'이란 이름으로 가게를 열었다. 이 대표는 군 전역 후 일손을 도우며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가업을 잇고 있다.

오랜 세월 한자리를 지키며 콩과자는 단순한 간식을 넘어, 수많은 이에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선물했다. 특히 해군과 지역 학교에 납품되며 '군 시절의 맛', '학창 시절의 간식'으로 지금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도 자꾸 먹자 "공부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매점 판매가 중단된 적도 있을 만큼 중독성 강한 맛이었다.

콩과자는 2023년 창원시 고향사랑기부제 답례품으로 지정돼 그해 제공 실적 6위를 기록했다. 세월이 흘러도 콩과자의 맛을 찾는 이들이 많다는 방증이다. 이들은 곧 이 대표가 전통을 이어가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출장을 오거나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오는 사람들이 꼭 사가야 한다면서 찾아와요. 예전에 진해 해군에 군납을 했는데, 나이 드신 분이 군 시절 먹었던 콩과자 맛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면서 전화도 오죠. 수십 년이 지나서도 찾아주는 분들을 볼 때 정말 고맙고 힘이 납니다."
경화당이 만든 진해 콩과자. /경화당

◇뚝심으로 지켜온 유산 = 콩과자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각종 방송과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인기를 끌었고, 포털사이트 실시간 인기검색어 1위를 두 차례나 차지할 정도로 화제였다. 공장 안은 연일 분주했고, 콩과자를 찾는 발길도 크게 늘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일본에서 관심을 갖고 수출을 제안한 것이다. 일본 기업에서는 신칸센 내에서 판매하자고 몇 차례 공장을 찾기도 했다. 다만, 당시만 해도 100% 수작업으로 콩과자를 생산해 물량 확보가 어려워 제안을 고사했다. 최근에는 영국에서 관심을 보여 시제품을 보내기도 했다.

다만, 풍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온라인 쇼핑 플랫폼이 다양해지고 화려한 신제품 과자들이 쏟아지면서 매출은 점차 줄어들었다.

주변에서는 다른 과자의 유행을 따라 재료를 바꾸거나 초콜릿 등을 입혀보라는 제안도 했다. 하지만 이 대표는 꿈쩍 않고 콩과자를 밀고 나갔다.

"다른 과자는 만들 줄도 몰라요. 콩가루 대신 다른 것을 섞어보라는 제안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기존 콩과자를 헤칠 수 있잖아요. 잘 된다고 쫓아갈 수 있나요. 콩과자의 가장 좋은 맛은 옛날부터 이어져 온 그 맛이니까 잘하는 것에 집중해야죠".

◇100년 된 소나무처럼 = 이 대표는 콩과자를 소나무에 비유했다. 소나무처럼 변함없는 맛이 자부심이라는 말이다.

"처음에 특산품을 만들려고 한 건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특산품이 될 줄은 몰랐죠. 방송에 나가고 전국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자연스럽게 특산물이 된 거죠. 돌이켜보면 한자리에서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신뢰가 쌓이고 누군가에게는 추억이 된 것 같아요. 소나무도 100년, 200년이 되면 가치가 더 빛나잖아요."

이 전통을 잇고자 노력한 점도 적지 않다. 이 대표는 과거 수작업 100%로 만들던 콩과자의 자동화를 이뤄냈다. 지금은 수작업 70%에 자동화 30%다.

수작업에 의존하던 생산 방식은 큰 걸림돌이었다. 4~5명이 온종일 붙어서 만들어야 했기에 인건비 부담이 컸고, 사업을 이어가기 위해 자동화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 대표는 집 한 채 값이 1800만 원이던 시절, 2200만 원을 들여 기계를 맞추는 과감한 투자를 단행했다.

콩과자를 만드는 기계는 없었기에 부지런히 서울까지 발품을 팔아야 했다. 돈도 많이 들고 꿈에 나타날 정도로 힘든 과정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계화를 이뤄냈다. 콩과자를 물려준 부모님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공장에는 여전히 아버지와 어머니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다.

"부모님이 참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콩과자를 발전시키려고 하는데 좌절이 많더라고요. 그때마다 무던하게 일했던 부모님을 생각했죠. 돌아보면 고비마다 부모님이 도와주신 것 같아요. 공장에 와서 이렇게 사진을 볼 때마다 많은 힘을 얻습니다."

100년 역사를 이어가는 지금, 이 대표의 바람은 소박하다. 지금처럼 변함없는 맛을 지켜내며 지역민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장사하는 사람이니 장사가 잘되기를 바랄 뿐이죠. 제품이 잘 될 때가 있고, 안 될 때도 있는데, 그건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잖아요. 콩과자의 전통을 변함없이 이어가면서 다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시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원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