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m 은빛 비행선과 건너온 아직 극복하지 못한 시간들

박동미 기자 2025. 9. 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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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일 리움미술관 ‘이불: 1998년 이후 展’
韓 첫 대규모 전시서 30년 회고
조각·설치 등 작품 150점 선봬
은빛 비행선 36명 사망사고 상기
신체와 기계 섞인 사이보그 W6
차갑고 따스한 양면성 품은 작품
파격 메시지·불편한 진실 담아
이불 작가가 전시장 입구 천장에 매달린 17m 길이의 은빛 비행선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 아래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Lee Bul, 리움미술관 제공

“과거는 늘 현재로 불러들여집니다. 우리가 극복했다고 생각한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극복하지 못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아직 떠나보낼 수 없는 것이죠.”

한국 대표 현대미술가 이불(61) 작가는 1일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사회·정치적 맥락과 맞물려 확장돼 온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1일 간담회에 참석한 김성원(왼쪽부터) 부관장, 이불 작가, 곽준영 학예사. 박동미 기자

극복했다고 생각했으나, 극복하지 못한 것. 예를 들자면, 2019년 작 ‘오바드ⅴ’가 이에 해당한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으로 긴장이 완화되던 때에 제작된 작품은 비무장지대 철거 초소에서 수집한 재료들을 활용했다. 근대성의 유산인 이데올로기 문제를 비판하며 동시에 평화를 염원한 작품은 얼마 안 가 남북 간 합의가 파기되고, 감시 초소들이 다시 세워지며, 다른 의미를 덧입는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충돌과 화해를 반복해온 인간사의 덧없음과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로서 말이다. 이불 작가는 “역사는 반복되고, 극복하지 못한 문제들은 모습을 바꿔 계속된다”면서 “내 작품에서 현재가 읽힌다면, 그게 작업하는 보람일 것이다”라고 했다. “반대로 제 작품을 두고 ‘이거 너무 지나간 얘기잖아?’라고 한다면, 문제가 사라진 것이니 인류를 위해선 그게 더 좋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오바드ⅴ’(2019).

신체와 사회, 인간과 기술, 자연과 문명의 관계를 폭넓게 탐구하며 동시대 미술의 최전선에 선 이불 작가의 서베이 전시 ‘이불 : 1998년 이후’가 오는 4일부터 리움미술관에서 열린다. 작가의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의 주요 작품 150여 점을 통해 그가 경험하고 사유한 세상을 만나는 자리다.

홍익대 미대를 나와 1980년대 후반부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이불 작가는 가장 급진적으로 여겨지는 퍼포먼스에서 시작해 조각, 설치, 평면의 순서대로 관심사를 바꿔가며 예술 세계를 키워왔다. 특히, 나체로 천장에 매달리는 ‘낙태’ 퍼포먼스가 유명한데, 이때부터 ‘파격적’이라는 수식어와 ‘여전사’라는 별명이 따라붙게 된다. 이불 작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규정한 것이다. 나는 그저 내 관심사를 작품으로 꾸준히 만들어가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30년간의 주요 작품을 둘러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그 말을 입증한다.

‘사이보그 W6’(2001).

작품들은 진보적이고 도발적이며 충격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그 표면은 매끄럽고 반짝거리며, 아름답고 정교하다. 차갑고 따스한 양면성도 품고 있다. 전시장 초입에서 만나는 거대한 은빛 비행선(‘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 신체와 기계가 뒤섞였으나 관능미가 두드러진 ‘사이보그 W6’, 비극과 쉼을 동시에 상기하는 ‘벙커(M.바흐친)’ 등이 모두 그러하다. 인류가 겪은 아픔과 인간의 본질적 두려움, 그리고 개인과 집단의 기억들이 ‘이불의 예술’에선 모두 자양분으로 쓰인 것이다. 작가 역시 “이번 전시는 작품을 시간순이 아닌, 과거와 미래의 모습으로 펼쳐낸 것이다. 자유롭게 느껴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한국 출신으로 세계 톱 현대미술가로 꼽히는 이불 작가는 이미 해외 주요 미술관에서 작품 세계를 집중 조명하는 전시를 수차례 진행했다. 리움미술관 측은 “이번 전시는 지난 30년간의 작업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국내 첫 대규모 전시로서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왜 1998년일까. 지난 2021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미 작가의 초기작(1980∼1990년대)을 중심으로 한 전시가 개최됐기 때문이기도 한데, 리움미술관 측은 “1990년대 후반은 작가가 미술관 전시와 비엔날레를 통해 국제적인 주목을 받으며 세계를 본격적으로 확장한 때”라고 설명했다.

‘롱 테일 헤일로’(2024).

전시는 연대기적 구성이 아닌, 입체적인 관람을 유도한다. ‘이불 월드’로 진입하기 위해선 우선 전시장 입구에서 17m에 이르는 거대하고 시끄러운 풍선 아래를 지나야 한다. 웅웅거리는 소리. 비행기의 이착륙 굉음과 사람들의 대화가 뒤섞인 공항 같다. 비행선 형태의 작품은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으로, 1937년 미국 뉴저지 상공에서 폭발해 36명이 사망한 당시 세계 최대 비행선 제플린사를 본뜬 작품이다. 기술의 진보가 인류의 멸망을 품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상기시킨다. 아래로는 2024년 작품이 현재를 인식시킨다. 지난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외벽에 설치해 주목받은 검은 조각상 ‘롱 테일 헤일로’다. 과거 ‘사이보그’보다 ‘혼종성’이 더욱 뚜렷해졌다.

1960년대 중반 한국의 정치·사회적 변혁 속에서 나고 자란 작가의 배경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됐는지도 엿볼 수 있다. 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욕조 형상의 작품이 대표적. 타일은 깨어져 있고, 욕조 안엔 검은 물이 가득하다. 또, ‘벙커(M.바흐친)’도 10대 시절 접경지역에 살며 감각한 세상이 담겼다. 작가는 어린 시절 정치적 탄압을 받은 부모님과 함께 자주 거처를 옮겨야 했다. 벙커에서 아이들과 뛰어놀았다는 작가는 군사시설을 역설적이게도 안식처, 즉 유토피아적 존재로 인식했다. 검은 산의 모습을 한 벙커는 다층적인 이불 작업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의 굴곡진 현대사뿐만 아니라 다양·다층적 사회문화적 요소를 품어서다. 형태적으로는 전후 일본 도시건축의 아버지 단게 겐조의 건축, 낭만주의 풍경화를 참조했다. 내부에선 헤드셋을 통해 대한제국 마지막 왕손 이구(1931∼2005)의 비극적 개인사를 들을 수 있다.

전시는 내년 1월 4일까지. 이후 3월 홍콩 M+ 뮤지엄을 시작으로 유럽 등 해외 순회전이 이어진다. 입장료 1만6000원.

박동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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