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은 겸손의 계절
길섶에 강아지풀이 배가 고파오는 계절
구월의 눈금 따라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초가을 반딧불 빛이 발등으로 내리고
하늘과 땅 사이, 만남과 이별 사이
슬픔과 기쁨 사이, 여름과 가을 사이
구월이 길섶에 와서 "찌륵 찌륵" 우는데
인간의 탈을 찾아 맨발로 걷고픈 계절
반쯤 시든 상사화가 시든 채로 다가와서
"인간아 너만 외롭냐? 구월이면 다 그래!"
물드는 숲에 들면 수군수군 거리는 소리
붉은 것은 붉은 것끼리 푸른 것은 푸른 것끼리
비로소 제 빛깔 찾아 하산 길을 고를 때
도두봉 잡목숲에 고만고만 예덕나무
고만고만 낮은 키에 고만고만 물드는 저들
슬며시 그 숲에 들어 나도 단풍 들까봐.
/2012년 고정국 詩
#시작노트
구월은 밖으로 향해 있던 시선을 내면으로 향하게 합니다. 시선이 밖으로 향해 있는 상태를 관찰觀察이라 하면서, 내면으로 향해 있을 때는 성찰省察이라는 낱말을 고릅니다. 이처럼 구월은 스스로를 돌이켜보는 거울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아 너만 외롭냐? 구월이면 다 그래!"하면서 애조로 대로변에 반쯤 시든 상사화가 풀이 꺾인 몸짓으로 말해주곤 한답니다.
그리고 오랜 폭염 끝에 한반도에 머물던 정체전선이 내려오면서 이곳 제주에 가을비가 내립니다. '추적추적'이라는 표현은 마치 추적추적秋積秋積 가을이 쌓여간다는 의태어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추적추적 가을비가
일박이일 다 채우네
폭염 막바지에
감지덕지 목을 축이던
먼발치 풀여치소리도
빗줄기에
섞이네,
- 「구월비」(2023) 중에서
가을비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찌륵찌륵 찌륵찌륵" 여태 제 짝 하나 찾지 못해 여름을 보내야 하는 수놈 풀벌레의 애절한 소리가 섞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초록 일색이던 풀과 나무들도 이 비 그치면 서서히 단풍기에 접어들면서 겸손의 빛깔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구월은 겸손의 계절'이라는 자연의 메시지를 감지하는 것도 글 쓰는 과정에서 누릴 수 있어서 좋습니다.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