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자 하나를 위한 세상 [똑똑!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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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출판인
아이는 정신질환으로 오래 고통받았다. 반복된 입원 끝에 겨우 맞는 약을 찾았다, 라고 하기엔 먹는 약이 너무 많았다. 약기운에 매일 12시간 넘게 자야 했고, 최선을 다해 운동을 해도 계속 살이 쪘다. 어릴 적 친구들은 취직하고, 결혼하고, 박사가 되었다. 아이는 망상에 시달리고, 강박사고에 쫓기고, 하루에도 몇번씩 공황발작을 일으켰다.
반전의 계기는 캐나다 정신보건센터에 나가면서 찾아왔다. 절망과 불안과 열등감에 휩싸여 집에만 있으려는 아이를 그들은 자꾸 불러냈다. 햇빛을 쬐게 하고, 세상을 보게 하고, 사람을 만나게 했다. 말을 시키고, 요리를 시키고, 종이를 오려 뭔가를 만들게 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도 삶이 있음을, 살아내려고 애쓰고 있음을 보면서 아이는 조금씩 달라졌다.
어느 날 아이가 대학을 가겠노라 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하면서도 뭘 어떻게 도와야 할지 막막했다. 놀랍게도 사회복지사가 입학처까지 동행해주었다. 그는 아이와 함께 현재 상태와 목표를 설명하고, 대학에서 정신장애인에게 제공하는 모든 편의를 확인했다. 학기당 이수 학점을 줄여주는 데서부터 과제 기한 연장, 시험 시간 연장, 별도의 시험 장소와 두명의 보조자 배정까지 촘촘하고 사려 깊은 지원이 제공되었다. 5년 반 후 아이는 자랑스럽게 대학 졸업장을 가슴에 안았다. 그것도 우등으로.
사단법인 무의는 ‘휠체어를 탄 딸이 어디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는 엄마의 꿈에서 시작되었다. ‘장애를 무의미하게’라는 슬로건 아래 그간 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지하철 환승 지도와 고궁 지도를 만들고, ‘모두의 1층’을 꿈꾸며 많은 건물에 경사로를 놓았다. 휠체어 접근 가능 장소 데이터를 축적해 지방자치단체와 정부에 정책도 제안했다. 그야말로 풀뿌리 시민운동으로 세상을 바꾸고 있다.
며칠 전 무의 이사장 홍윤희씨의 칼럼을 읽다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휠체어 타는 딸이 벌써 고3이 되어 곧 수능을 보는데, 미리 요청하지 않으면 장애인 화장실이나 엘리베이터가 없는 학교로 고사장이 배정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학교나 교육청이 아니라 선배 장애 학생이 말해주었다는 대목에서는 기가 막혔다. 항상 스스로 해결책을 모색하는 단체답게 무의는 올가을에 학교 안 휠체어 접근성 조사 활동에 나선다. 데이터만 있으면 프로그램을 돌려 장애 학생에게 안내하는 건 일도 아닌데, 데이터 자체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국가가 해야 할 일이지만, 일단 무의에서 비용을 대고 조사는 학생들이 직접 시행한다. 시민의 후원과 관심이 필요하다.
시청각장애인 박관찬씨가 떠오른다. 그가 쓴 책에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장애인이 겪는 어려움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직업을 얻기 위한 교육이 지원되긴 하는데 시청각장애인은 귀가 들리는 사람을 위한 시각장애반에도, 눈이 보이는 사람을 위한 청각장애반에도 들어갈 수 없다. 평생 장애를 갖고 사는 것도 억울한데, 국가 시험에 응시할 때마다 매번 의사 진단서를 내야 한다. 본인 인증을 받는 과정은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에게 사실상 넘을 수 없는 벽이다. 이런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장애인에게 우리 사회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처럼 암울하고 강고한, 이해할 수 없는 공포로 가득 차 있는 곳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밀려든다.
우리는 선진국이다. ‘케데헌’이나 손흥민, 미국에서 목을 매는 조선업이나 전세계가 줄을 서는 방위산업을 보라. 하지만 우리의 발전은 들쭉날쭉하다. 어느 나라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앞선 분야가 있는가 하면, 후진국형이라 할 정도로 아쉬운 구석도 많다. 유례없는 급속성장을 해온 탓이다. 그렇더라도 앞선 부분은 죄다 돈이 되는 것이고, 아쉬운 부분은 인간의 존엄과 품위에 관한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마음이 어두워진다. 속도를 줄여야 한다. 약자와 소외된 사람을 일으켜 손을 잡고 함께 걸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스스로 선진국임을 느끼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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