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철의 도쿄레터] ’15엔 50전' 발음 못 해 숨진 일본인

도쿄/성호철 특파원 2025. 9. 2.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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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학살’ 관동대지진 추모식
日 매체 “자경단, 청각장애인을
조선인으로 착각하고 살해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대지진 당시 벌어진 조선인 학살 과정에서, 일본 청각장애인도 조선인으로 오인돼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졌다.

아사히신문은 1일 “일본어로 ‘15엔50전’을 발음하지 못하고 조선인으로 오인당해 자경단에게 살해된 도쿄농아학교 졸업생의 사건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비극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로 시작됐다. 이성을 잃은 일본 자경단은 조선인 색출에 나섰다. 길거리에서 행인을 붙잡고 ‘15엔 50전(주고엔 고짓센)’을 발음하라고 했다. 조선인은 탁음으로 된 첫 음을 ‘추고엔’처럼 거센소리로 발음한다는 걸 이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일본인 청각장애인이 조선인으로 오인됐다.

사실 청각장애인은 발화(發話) 자체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당시 희생된 청각장애인은 타인의 입술과 입 모양을 흉내 내 발음하는 ‘구화법’에 뛰어났다. 도쿄농아학교를 대표해 일본 황족과 만나 대화한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일본인 자경단은 그를 청각장애인이 아닌, ‘조선인의 발음’으로 오인했다.

아사히신문은 “당시 자경단원들이 청각장애인 형제에게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얘기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했다. 가해자인 자경단원들조차 발음만 가지고 사람을 죽이는 상황을 인지했다는 방증이다.

1일 도쿄의 한국문화원에선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이 주최한 관동대지진 추모식이 열렸다. 102년 전, 도쿄를 덮친 규모 7.9 강진의 혼란 당시 일본인 자경단과 군인들에게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했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 조사나 사과 없이 10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2년 전 본지가 일본 스기오 히데야 의원실(입헌민주당)을 통해 입수한 ‘사이토 마코토 문서(사이토 마코토가 조선 총독을 지낸 1919~1927년, 1929~1931년 기록된 공식 문서)’는 ‘조선인 학살자 813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천황 직속 기관인 조선총독부가 수행한 조사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정부 기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40대의 한 일본인 지인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자체를 들어본 적이 없는 일본인이 대다수일 것”이라며 “‘과거에 메이지유신이 있었다’와 같이 관동대지진은 먼 과거의 일일 뿐, 조선인 학살은 배운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했다. 102주년을 맞아 다시 돌이켜봐야 할 이 비극은 ‘조금 더 멀어진 과거’로 떠밀려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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