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도쿄가 가르쳐준 것들

일본 정치기사를 쓸 때면 가장 어려운 건 거리 조절이었다. 기자의 중립성과 한국 독자들이 기대하는 감정의 밀도 사이에서 종종 '한국인의 시선'을 요구받았다. 그러다 곧 알게 됐다. 정작 일본 사회를 움직이는 건 국회의 말이 아니라 골목을 지키는 가게 주인의 한마디였다.
"한국에서 온 손님들은 웃을 때 눈이 참 예뻐요." 아카렌카 창고의 점원이 건넨 이 말은 어떤 외교수사보다 뭉클했다. 집 앞 편의점의 점장님은 "안녕하세요"라며 매번 한국어로 인사해줬고, 신라면을 계산대에 올리면 "그거 제일 좋아해요!"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혐한 시위의 뉴스가 도는 날에도 그런 말 한마디가 이 세계를 다시 환하게 했다.
한일 관계는 뉴스에서 전략적 계산으로 다뤄지지만 현장에서는 감정과 호감, 일상의 작은 습관이 더 길게 남았다.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두 나라가 때로는 오해하고 때로는 웃는 장면들. 그게 내가 도쿄에서 가장 많이 목격한 '한일'이었다. 가끔 일본 지인들이 물었다. "한국은 왜 그렇게 자주 싸워요?" "왜 그렇게 속도가 빨라요?" 처음엔 웃으며 넘겼지만 문득 그 질문들에 오래 머물게 됐다. 그건 한국 사회의 갈등 과잉이 아니라 관심의 농도에 가까웠다. 싸움은 곧 참여였고, 그만큼 뜨겁게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반대로 일본을 지켜보며 가장 많이 느낀 키워드는 '조심스러움'이었다. 말 한마디에도 맥락이 따르고, 결정 하나에도 공감대를 먼저 살핀다. 모두가 이해 가능한 선에서 움직이기에 빠르진 않지만 균형은 유지된다. 그런 일본 안에서 보면 한국은 지나치게 솔직하거나 다혈질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솔직함과 열정이야말로 이 사회를 끌고 나가는 에너지였다.
신오쿠보의 한국 음식점엔 늘 긴 줄이 늘어선다. 손님들은 드라마 속 장면을 따라 하듯 소주를 주문한다. 가게 안엔 한국어, 일본어, 영어가 뒤섞였고 모두가 거리낌 없이 서로의 문화를 즐겼다. 국경을 넘는 건 콘텐츠였지만 그걸 일상으로 만든 건 결국 사람이었다.
언젠가 오사카에서 만난 재일동포 3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늘 양국 사이에 있어요. 그런데 사이에 있다는 건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사이가 있다는 건 연결이라는 뜻이니까요."
이런 사람들 덕분에 나는 뉴스를 넘어선 관계를 믿게 됐다. 혐한도, 반일도, 그것이 모든 진실이 아니란 걸 현장에서 체감했다. 감정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지만, 감정을 녹이는 것도 사람이었다.
도쿄는 맑은 풍경보다 표정이 인상적인 도시다. 눈인사로 시작된 단골 라멘집, 정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던 인터뷰이, 새벽에 이메일로 긴 답장을 보내준 도쿄대의 교수. 다들 한일 관계라는 단어보다 먼저 '사람'으로 남았다.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바라볼 한국은 도쿄에 오기 전과는 조금 다를 것이다. 일본이라는 렌즈는 앞으로도 내 시선 어딘가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일본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곳의 편의점 조명과 지하철역 플랫폼에서 흘러나오던 도쿄 메트로의 멜로디를 함께 떠올릴 것이다.
외교, 무역, 역사, 안보 같은 복잡한 한일 문제 속에서도 이 틈새를 비집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국경은 분명하지만 마음 사이엔 경계가 없다. 그 마음의 문을 열어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도쿄에서 배웠다. 내가 경험한 이 '사이의 기억'이 누군가에겐 새로운 시선이 되기를 바란다. 한일 관계, 그 복잡한 간극 사이에서도 정답은 늘 사람이다.
km@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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