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국제질서, 한국 안보의 삼중 과제 [세상읽기]

한겨레 2025. 9. 1.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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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8월25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디시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섭 |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노심초사 끝에 관세 협상이 타결됐고, 관심을 모았던 한-미 정상회담도 무난히 마무리됐다. 우려했던 돌발 상황이나 껄끄러운 장면 연출 없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우호적 관계를 형성한 좋은 출발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는 최악의 상황을 피한 것일 뿐, 앞으로 예상되는 도전은 만만치 않다.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를 지렛대 삼아 우방국들로부터 수천억달러 투자를 받아냈다. 한국도 결과적으로 15%의 추가 관세를 맞아가면서, 오히려 3500억달러 투자라는 선물을 미국에 헌납한 격이 되었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관세정책이 일종의 ‘수금 활동’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심지어 ‘글로벌 강탈’, ‘수탈적 제국’이라는 거친 표현도 등장하고 있다. 안보 문제는 또 어떤가. 미국은 북한 위협은 한국이 떠안으라고 하면서, 한-미 동맹의 역할을 중국 견제로 확장하려 한다. 국방비 증액과 미국산 무기 구매 압박이 이어지고, 심지어 주한미군 기지 부지를 소유하고 싶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엉뚱한 발언도 나왔다. 결국 동맹의 효용은 줄어드는데, 동맹의 비용은 늘어나는 모순적 상황을 맞고 있는 셈이다.

미국의 변화와 국제질서의 대전환을 맞아 전세계가 전전긍긍하고 있다. 원래 중국을 경계하며 쓰던 ‘디리스킹’(de-risking·탈위험)이라는 용어가 미국에도 적용되고 있고, 중국의 부상을 걱정하던 나라들이 이제는 미국발 질서 파괴를 우려하는 ‘유사입장국’이 된 것이다. 이제 누가 현상유지 국가이고, 누가 현상변경 세력인지 모를 지경이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강대국이 내세우는 ‘이익의 조화’라는 신화를 비판하며, 기득권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을 보편적 이익으로 포장해 전세계에 강요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조화는 이데올로기일 뿐 영원할 수 없다. 미개척 식민지의 고갈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이익의 충돌’을 경험했듯, 오늘날 국제질서에서도 워싱턴발 ‘조화의 붕괴’가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추격과 자국 산업 기반의 붕괴로 여유를 잃은 미국이 이제는 자신만의 국익을 거칠게 추구하는 보통 강대국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트럼프 시대는 강대국의 가면이 벗겨지고, 국제정치의 민낯이 드러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런 대격변의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우선 흔들리는 국제질서 속에서 무조건적인 진영 논리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자유 진영의 맹주였던 미국은 이제 국제 갈등에서 중재자를 자임하고 있다. 중동에서 그렇고, 우크라이나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아시아에서는 어떨까. 미국이 과연 대만을 지키기 위해 중국과 전쟁을 불사할 수 있을까. 핵전쟁 위험을 감수할 만큼 대만이 미국에 사활적 이익일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푸틴의 침략에 맞서 전 지구적 투쟁에 동참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결국 강대국의 타협 대상이 된 것처럼, 대만도 언제든 비슷한 운명을 맞을 수 있다. 미-중 경쟁에서 전략적 모호성을 버리고 명확히 입장을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각에선 제기되지만, 정작 미국의 태도 자체가 과연 일관되고 명확한지 의문이다.

국가안보는 결국 세가지 길밖에 없다. 강력한 친구를 두거나, 스스로 힘을 기르거나, 아니면 위협 자체를 낮추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에겐 든든한 동맹이 있어왔다. 앞으로도 미국이 한반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관리해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자강의 노력을 배가할 때다. 안보를 다른 나라에 의존하면 위험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 압박에도 취약해짐을 이제는 자각해야 한다. 아울러 위협을 관리하고 우호적 전략 환경을 만들어가는 노력이 절실하다.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대북 확성기 철거, 남북한 체제 상호 인정 같은 조치는 그런 점에서 긍정적이다. 또한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유럽 등 규칙 기반 질서 복원에 이해를 함께하는 나라들과의 협력도 필요하다. 특히, 중국·러시아와의 관계를 잘 풀어가야 한다. 동아시아 질서를 좌우할 중국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장기적 관점에서 고민해야 하며, 북·러 밀착을 견제하고 대륙 외교를 복원하는 차원에서 러시아와의 관계도 중요하다. 이념도, 진영도, 규칙도 흔들리는 세상이다. 동맹 관리, 한국군의 자강, 그리고 우호적 전략 환경 조성, 이 세가지가 앞으로 한국이 풀어야 할 삼중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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