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결사 항전과 민족해방 상징, 권력자엔 불편한 대상일 뿐
백산 등 80인 대동청년단 조직
독립운동 자금 지원ㆍ교육 활동
상회 설립해 임시정부 뒷받침
1919년 독립선언서 서명ㆍ발표
북로군정서 및 독립군 양성 등
대종교, 일제 독립운동 큰 역할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의병 토벌 만주군 출신 박정희
권력 장기유지 위해 탄압ㆍ매도

"안중근은 일본의 초대 총리를 살해, 사형 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2014년 1월 중국 하얼빈에 안중근 기념관이 건립됐을 당시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한 말이다. 관방장관은 일본 정부의 대변인이기도 하다. 스가의 생각은 한국의 이른바 뉴라이트들과 비슷하다. 김구도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는 뉴라이트들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이 조선의 식민지화를 앞당겼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본은 1909년 7월 6일 '한국병합 실행에 관한 건'을 이미 의결하고 적절한 시기만 보고 있었다.
1909년 조선 주둔 일본 군대는 이른바 '남한대토벌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의병 소탕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군대는 2년 전인 1907년 이미 강제 해산된 상태였다. 1902년부터는 일본의 일개 시중은행인 제일은행 발행권이 조선의 법정 화폐로 통용되고 있었다. 망국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백산은 금테 안경에 일본 옷을 입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고급 여관에 묵을 정도로 신분을 위장하며 살았다. 공개적이고 합법적 공간 위주로 활동을 하면서도 그랬다. 대동청년단은 백산의 유일한 비합법 비공개조직이었다.
백산은 나라가 망한 이듬해인 1911년 조선을 떠나 1914년 9월까지 러시아와 중국에 머문다.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쑨원(孫文)을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수립되던 시기였다. 1914년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해이기도 했다. 백산은 안창호, 신채호 등과 의논한 결과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국내의 비밀연락망과 안정적인 자금조달이 절실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귀국해 백산상회를 설립한다. (귀국이 1912년이고 백산상회 설립도 1914년 이전이라는 설도 있음)

주요 투자자는 부산 구포 지역의 지주와 경주 최씨 집안이었다. 오미일의 논문 '일제 시기 부산지역 백산상회의 창립과 변천'에 따르면 합자회사 설립 당시 무한책임사원은 안희제, 윤현태, 최완 등 3명이었는데 윤현태의 동생 윤현진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초대 재무차장을 맡았고, 최완도 재무부에서 활동했다. 이들이 임시정부의 자금조달을 책임졌다는 뜻이다. 오미일에 따르면 당시가 호황기의 절정이었음에도 백산상회의 영업 실적은 아주 부진했다. 백산상회는 차입금과 지불어음 등 1919년 기준 55만 원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물가상승률을 기준으로 한 챗GPT 추계에 따르면 당시의 65만 원은 현재 가치로 최대 수백억 원대라고 한다.
역사가들은 이렇게 빼돌려진 돈이 상해 임시정부로 흘러갔을 것으로 본다. 백산상회는 1919년 주식회사 백산무역으로 재출범하지만, 일본 경찰의 노골적인 탄압 속에 누적 적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1928년 파산한다. 백산은 늘 바빴다. 1920년대 초 임시정부 비밀연락조직인 교통국의 국내 총괄조직이 부산 백산상회에 있었고, 백산 본인이 직접 연락책으로 움직이기도 했다.

백산은 멀티 플레이어였다. 1926년부터는 뒷날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사회부 장관이 되는 전진한을 지원해 협동조합 운동을 벌이고 기관지로 '자력(自力)'을 발행한다. 협동조합은 경제적 약자인 소생산자나 소비자가 서로 협력,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킬 목적으로 공동출자로 설립된 기업이다. 생산조합, 소비조합, 신용조합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된다. 조선 민중을 위한 새로운 경제적 대안의 실천이었다. 일제가 출판을 금지했던 '자력' 창간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자력(自力)이다. 굶주려 비쩍 여윈 몰골로 손발을 묶이고 채찍을 맞으면서도 차마 죽을 수 없었던 조선의 자력이다. 내 발아래에는 오직 생사가 있을 뿐이다. 또 다시 나를 위협할 어떤 것도 없을 것이다."
안희제는 1929년 <동아일보>, <조선일보>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 3대 신문이었던 <중외일보> 사장에 취임하지만, 기사와 관련해 잇따른 발행중단과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1년여 만에 중외일보는 발행을 중단한다. 계속되는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활동공간이 축소되자 백산은 1933년 중국 만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백산은 발해의 옛 수도 상경용천부가 있던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닝안현(寧安縣)을 주목했다. 그는 대규모 토지를 매입하고, 송화강의 지류인 무단강(牡丹江) 상류 일부를 석축으로 막아 수로를 건설해 '발해농장'을 조성했다. 백산상회 지배인 출신으로 금광 개발에 성공한 김태원의 재정적 도움이 컸다. 발해농장은 만주를 거점으로 하는 새로운 국외 독립운동기지였다.

1934년에는 대종교 총본사를 발해농장 부근으로 옮기도록 했다. 1909년 나철이 '단군교(檀君敎)'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대종교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1919년 2월 발표된 '무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명 중 25명이 대종교 교인이었다. 조소앙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에는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을 비롯해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유동열,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상룡, 이승만, 이시영, 박용만, 박은식, 신규식, 신채호, 안창호, 윤세복, 황상규 등 39인이 서명하였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제헌의회) 35명 가운데 28명이 대종교 교도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의 주역인 서일, 김좌진, 이범석 등의 북로군정서도 대종교가 양성한 군사조직이었다. 대종교는 민족 정체성의 원천이었지만, 만주에 대한 일제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혹심한 탄압을 받았다.

1945년 해방 당시 0.5%였던 개신교 신자 비율은 이제 20%에 이른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하느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발언하는 목사의 지휘 아래 광화문에서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를 흔들고 있다. 그래서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하늘의 도는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耶非耶)"

☞ 필자는 KNN 사장, 한국인터넷진흥원장,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고인돌과 인공지능'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언론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으며 콘텐츠와 한국 언론기업의 문제에서부터 산업혁명 이후 헤게모니를 둘러싼 세계와 한국의 근현대사, 생성형 인공지능, 플랫폼, 빅데이터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