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욱의 따따부따] 장기로 보는 승부와 지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던 '장군이요, 멍군이요'란 소리가 그립다. 동네 어귀 느티나무 아래에는 삼베적삼 입은 노인들의 장기 놀이가 한창이었다. 가상의 승부를 점치는 구경꾼의 훈수와 역정 소리, 조무래기들의 깔깔대는 웃음은 지나온 시절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장기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다. 약 4000년 전 고대 인도의 서북부 지역에서 행해지던 인도의 보드게임인 '차투랑가(chaturanga)'로 보고 있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인 차투랑가의 풀이를 통해 "이는 코끼리 부대, 기마부대, 전차 부대, 보병 부대로 이루어진 당시의 전군을 뜻한다."라고 대한장기협회는 정리하고 있다. 서양의 체스, 일본의 쇼기, 중국의 샹치 등 모두 차투랑가에서 유래돼서 오랜 세월을 통해 현지화되고 변화했다고 추측한다. 고대 장기의 형태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존재하지 않아 한국 장기의 유래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장기에 관한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 열전 도미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제의 개루왕은 도미의 미인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도미와 내기 장기를 두어 이겼으므로 너를 얻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 장기는 여느 나라의 보드게임과 달리 독특함을 유지하고 있다. '상차림'으로 불리는 전투대형의 구성이 그것이다. 서로가 포진을 구축하고 공방을 주고받는 점은 우리 장기의 매력으로 꼽히고 있다. 처음부터 졸이나 병이 좌우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은 체스나 쇼기의 보병과 구별되는 독특한 부분이다.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을 상징하는 장기의 규칙은 단순한 놀이의 재미로 끝나지 않는다. 어느 특정 기물을 떼고 시작하는 '접장기'를 제외하면 초를 쥔 쪽에게 선공을 양보한다. 이는 연장자나 고수가 한나라를 쥐고 시작하는 '게임의 규칙'에 따른 여유와 배려의 승부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정식 대국에서는 이와는 다른 규칙이 적용된다. 공평과 공정을 위해 추첨이나 제비뽑기가 일반적으로 적용된다.
적진을 향해 나아가는 진법의 목표는 궁(나라)을 잡는 것이다. 진법의 운용은 곧 그 사람의 실력을 가늠한다. 좌우의 빠른 움직임과 원거리의 공격을 전차가 담당한다. 적군과 아군의 머리 위로 포가 비상한다. 코끼리와 말이 만드는 나름의 기동력도 차와 포의 기동력에 미치지 못한다. 장기의 가장 중요한 기물이란 점에서 '차 떼고 포를 떼다'라는 말이 유래한다. 어떤 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제외할 때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차, 포의 진행은 졸의 방어에 자유롭지 못하다. 한낱 한 칸만을 움직일 수 있는 졸이지만 자신의 희생으로 차의 움직임을 방어한다. 차와 포의 화려함과 강인함도 연이은 두 졸을 이기지 못함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우리 인생의 진리를 담고 있다. 말단의 위치와 느린 움직임은 애처롭기조차 하지만 졸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희생의 결과물인 탓이다. 장기판의 어느 기물도 사사로운 것이 없다. 오직 궁(나라)을 지키려는 의무감으로 존재한다. '장군이요'라고 궁의 몰락을 알리는 소리는 상대방의 방어와 경계를 불러온다. '멍군이요'라는 화답은 감사와 더불어 자기 안위에 대한 안도의 목소리다. 승부가 결정되면 궁을 장기판 아래로 내린다. 그것은 패자의 자세이자 예의다.
정치 속 집권의 과정은 한편의 장기판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대권을 쥐려는 각 당의 전략은 수많은 희생을 강요한다. 평당원의 목소리와 희생으로 정치적 프레임이 완성된다. 그 프레임을 이용한 집권의 전략은 대의원을 비롯한 당 집행부의 몫이다. 원내외의 패널을 이용해 집권의 당위성을 피력하는 것은 또 다른 전략의 하나이다. 최근 여야의 당 대표 선거를 통해 이채로운 부분은 평당원 중심의 정치적 흐름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단순히 희생의 '졸'로서가 아니라 집권을 위한 주류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하지만 분명 그 한계는 존재해야 한다. 승부의 목표와 본질이 무너질 때 위기를 부르는 것 또한 그들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